한국서 나고 한국인으로 배우고 자랐지만 '유령 한국인'
한시적 구제책 내년 3월말 종료…시민단체 '정착 제도화' 촉구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기자 = 지난 8일 전북 김제시에 있는 한 특장차 제조업체에서 이주민 출신 32세 노동자 강태완 씨가 작업 중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주민지원단체 등에 따르면 강씨는 새로 개발된 10t짜리 장비를 시험하기 위해 옮기다가 고소 작업대와 이 장비 사이에 끼여 변을 당했다.
강 씨는 5세 때 어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이주해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다가 올해 취업에 성공해 거주 비자를 받은 몽골 국적의 청년이다. 그는 한 중앙일간지가 4년 동안 연재해온 '몽골 이주아동 이야기'의 주인공이었고, 그동안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의 대표적 사례로 알려졌는데 끝내 '코리안 드림'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경기도 군포에서 초중고를 다니면서 한국어만 썼지만 내내 '미등록' 신분이었다.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로 자란 것이다. 중학교 때 친구랑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이 체류 자격이 없는 신분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에게 항상 참고 살라고 가르쳤다.
고교 졸업 후에는 이삿짐센터와 공장 등에서 일했고, 자진 출국한 미등록 이주민에게 재입국 기회를 주는 정부의 '구제대책'에 따라 한차례 몽골 출국을 거쳐 유학 비자를 받을 수 있었고, 경기도의 2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 올 3월 김제의 특장차 제조업체에 취업했다. 지난 6월엔 거주 비자도 받았다. 그러나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얻은 지 4개월여만에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는 지난달 이주노동단체 '이주와 인권연구소'와 한 인터뷰에서 "지역특화형 비자를 알게 돼 전북까지 와서 일하게 됐다"면서 "전북에서 5년 일하면 영주권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고 들었고, 영주권을 받고 귀화까지 하는 게 제 목표"라고 말했다. 법적으로도 완전한 한국인이 되고 싶었던 꿈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강씨 유족과 노동단체들은 14일 전북 전주시 고용노동부 전주지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강씨 사망사건에 대한 신속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강씨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30년 넘게 자식을 키웠는데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었다"며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내 아들의 사고에 대한 진상을 밝혀달라"고 했다.
◇ '엄연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아이들'
강씨는 20여년을 한국에서 자라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고 한국인의 정체성이 형성돼 있지만 법적으로는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면서 사회에서는 가려진 존재였다.
미등록 이주아동은 이주민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했거나 한국에서 태어난 아동 중 부모의 체류자격 상실, 난민 신청 실패 등 다양한 이유로 법적 체류 자격이 없는 아이들을 말한다.
체류 자격이 없는 부모에서 출생한 아이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불법 체류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당장 추방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라 학습권이 보장돼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는 다닐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온전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출생신고나 외국인등록이 안 돼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사회적 보호나 공적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쉽게 할 수 있는 본인 명의의 휴대전화 개통도 못 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고 은유 작가가 써 2021년 출간한 책『있지만 없는 아이들』(창비)을 보면 미등록 이주아동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애환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는 이주아동과 부모, 관련 활동가 등 9명을 인터뷰한 내용이 실렸는데 이번 산재로 숨진 강씨의 어머니도 그중 한사람이다.
이 책 작가는 "미등록 이주아동은 공부할 권리는 있지만 살아갈 자격은 없는 모순된 현실에서 '있지만 없는 아이들'로 자라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주민 지원단체 등에서는 현재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을 약 2만명으로 추산한다.
◇ '구제대책'에 또 '구제대책'…그것도 4개월 남았다
정부는 그동안 미등록 이주아동을 구제하기 위한 대책을 몇차례 내놨는데 모두가 한시적이었다.
법무부는 국가인권위의 권고를 일부 수용해 2021년 4월 국내 출생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구제대책을 발표했다. 국내 출생, 15년 이상 국내 체류, 초중고 재학 또는 고교 졸업이라는 요건이 맞는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체류자격을 부여하고, 대상 아동의 부모에게는 범칙금 납부를 조건으로 아동이 고교를 졸업해 성인이 될 때까지만 국내 체류가 허용되는 내용이었다.
그 후 2022년 1월 구제 대상 요건이 완화된 개선안이 나왔다. 아동의 체류 기간을 15년 이상에서 6년 이상으로 줄이고, 범칙금 납부 능력이 없는 부모에게는 범칙금을 감면받을 수 있게 했다. 이 대책도 2025년 3월31일까지 한시적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정부의 구제대책을 통해 체류자격을 부여받은 이주아동은 962명(2024년9월 전현희 의원실 자료) 수준이다. 초중고에 재학 중인 미등록 이주아동이 3천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점을 고려할 때 여전히 많은 이주아동이 구제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체류자격을 부여받고 고교 졸업한 후에는 대학에 입학해야만 국내에 계속 머물 수 있다. 다만 성인이 된 후에는 1년간의 임시체류 자격이 부여된다. 그러나 공교육을 이수하지 못한 아동들은 이런 구제대책에서 소외되는 등의 문제가 꾸준히 지적돼 왔다.
지금까지 구제대책 연장 여부에 대한 정부의 공식 발표는 없는 상태다. 법무부 관계자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한 공식 입장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주민 지원 시민단체들은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한시적인 구제대책을 제도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달 4일 국회에서도 김선민·서미화·차지호 의원실과 국가인권위, 관련 시민단체 주최로 제도 개선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김사강 이주와 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은 토론회 발제를 통해 "정부가 인구감소 해결과 인력난 해소의 명목으로 매년 이주노동자와 유학생 유치 규모를 늘리고 이들의 국내 정착을 유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펴고 있는데 정작 국내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이주아동에게는 역설적으로 안정적인 체류자격 부여를 통한 정착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익법단체 '두루' 소속 김진 변호사는 토론에서 "한국에서 일정 기간 거주하며 교육을 이수하고, 한국에서 언어, 문화를 익히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한 아동은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출생지역 및 사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진로를 형성할 수 있도록 적절한 체류자격을 신청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bond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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