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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음식문화평론가] 인류의 역사는 음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밥상은 이미 과거의 밥상이 아니다. 조선후기의 기록에 성인남자는 7홉의 쌀로 한 끼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지만 이제는 사실이 아니다.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집계가 시작된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한 끼에 평균 밥 반 공기 정도로 버티고 있다. 반면에 육류소비량은 쌀 소비량을 추월하고 있다. 지난해 돼지, 소, 닭고기 등 3대 육류 소비량은 1인당은 60.6㎏으로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우리경제의 산업화는 외식산업의 발달과 함께 식생활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우리의 식탁에 20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브로콜리, 셀러리, 파프리카가 등장하고 식당에는 부대찌개, LA갈비 같은 정체가 모호한 음식들이 팔리고 있다. 인스턴트식품과 배달음식의 소비는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 시대의 음식문화 발전에는 항상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즐기며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식기와 식탁예절을 도입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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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수라상, 궁밖으로 나오다
1903년 이른 봄, 대한제국은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궁의 연회와 음식을 주관하는 궁내부 전선사에 근무하던 안순환(1871년~1942년)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고는 하나 나라 꼴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안순환은 정문루와 화월루같은 일본요정들이 밀려드는 손님으로 성황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 사업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는 황제에게 올리던 궁중요리를 일반손님에게 제공하고, 궁의 연회를 비슷하게라도 즐길 수 있는 조선요리점을 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나라가 저물어가니 궁의 규모도 쭈그러들고 있었다. 나인, 별감, 내시 등의 인원이 서서히 축소되고 있었다. 갑오개혁으로 관기 제도가 폐지되어 기생들은 일자리를 잃고 있었고, 대전의 수라간에도 잘려 나간 사람들이 허다했다. 안순환은 우선 궁을 떠나 놀고 있는 인력들을 규합했다. 덕수궁에서 치러진 고종의 망육십 잔치를 준비했던 반감과 숙수들도 끌어모았다. 반감 밑에서 육류와 밥, 구이, 두부, 술, 차, 떡, 찜 등을 분야별로 담당하는 각색장들도 솜씨가 빼어난 이들로 선발했다.
안순환은 당시의 기록이 “주먹을 써보지 못하면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망나니”라 적고 있을 정도로 당대 제일의 완력가였다. 그는 상재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임금의 식사를 어떻게 손님에게 내놓을까를 궁리했다. 궁의 연회에서 임금이 받는 진어상은 음식의 가짓수도 많고 높이 고인 고배상으로 화려하지만 실제로 먹지는 않는 장식용이었다. 그런 상차림이 보기는 좋아도 요릿집에 음식을 즐기러 오는 손님들에게 내놓을 수는 없었다. 임금의 평소 밥상인 수라상도 기본적으로 혼자 먹는 독상이고 대원반, 곁반, 책상반 등 무려 세 개의 밥상으로 차리는 식사였다. 시중드는 상궁만도 세 명이나 필요한 복잡한 밥상을 장사하는 집에서 내놓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그가 고안해낸 것이 네 사람이 겸상하는 교자상이었다. 안순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술상 차림인 건교자와 밥상 차림인 식교자로 나누어 손님의 용도에 따라 내놓을 구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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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환은 혁신적인 경영자였다
음식의 구성에도 신경을 썼다. 손님들에게 궁중요리라고 관심을 끌려면 차림이 화려하고 특색이 있어야 하니까 민가에서는 생소한 열구자탕과 구절판을 상의 중앙에 놓도록 했다. 열구자탕은 신선로의 다른 이름으로 ‘먹어서 입이 즐거운 탕’이라는 뜻이다. 신선로에는 양지머리, 우둔, 간, 천엽, 등골 등 소고기의 각종 부위와 해삼, 생선 살, 표고버섯, 호두, 잣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다. 따라서 국물 맛이 오묘하고 감칠맛이 있어서 까다로운 임금의 식성을 사로잡던 음식이었다. 그 외에 각종 찌개. 전골, 편육, 생선회, 전복회, 육회, 육포, 어포, 찜, 전유어 등과 각종 떡, 한과, 과일 등도 골고루 상에 올릴 것을 지시했다. 고종황제가 좋아하는 냉면도 식단에 넣었다. 배를 많이 넣어 담근 동치미 국물에 말아서 내는 냉면은 시원한 것이 술자리의 마무리 식사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선주후면이란 말이 생긴 이유가 다 있었다. 메밀면 위에 편육을 열십자 모양으로 얹고 배도 숟가락으로 얇게 저며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어 덮은 뒤, 그 사이사이에 잣도 듬뿍 올려 모양을 냈다. ‘고종 냉면’이라는 별칭에 입맛을 쩝쩝 다시는 손님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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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도 다양하게 계절에 맞추어서 준비를 시켰다. 오이지를 꿩 육수로 나박김치같이 담근 생치침채와 고종의 수라상에 올라가던 젓국지와 송송이, 동치미도 갖추게 했다. 젓국지는 젓갈을 넣고 담근 통배추김치를 말하는데 비린내가 많이 나는 멸치젓이나 갈치젓은 못쓰게 하고 새우젓과 조기젓, 황석어젓으로 담그게 했다. 송송이는 깍두기인데 궁에서는 된소리 발음을 하지 않으며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말하기 때문에 송송이라고 불렀다. 송송이는 무 외에 배추속대와 버섯, 밤, 배 등과 해물까지 넉넉히 들어간 호사스러운 김치이다.
개업을 준비하면서 안순환은 기발한 발상을 했다. 밥상의 배달에 착안한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배달 음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효종갱같이 남한산성의 갱촌에서 밤새 끓인 해장국을 새벽에 성내의 대갓집으로 배달하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런데 안순환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화려한 교자 음식과 진찬합, 건찬합을 주문하면 어디라도 배달해줄 생각을 한 것이다. 가정집에서 손님을 청했을 때 일일이 음식을 준비하는 어수선함을 피할 수 있으니 참으로 편리한 서비스였다. 그 외에도 단체의 회식이나 회갑 잔치, 결혼피로연 등도 제공할 생각을 했다. 궁중요리를 접대 음식으로 마련해 줄 뿐 아니라 호화로운 장소에다, 춤과 소리 같은 여흥까지 제공하는 획기적인 사업계획이었다. 안순환은 혁신적인 경영자였다.
◇한정식차림의 효시가 된 ‘교자’
장소는 황토마루의 개인 저택(지금의 광화문 일민미술관 자리)으로 고르고 임대계약도 마쳤다. 옥호는 명월루로 정했다가 나중에 명월관으로 바꾸었다. 1903년 9월 17일, 명월관이 문을 열었다. 안순환은 궁내부에 사표를 내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워 개업했다. 궁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사업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개업 며칠 전부터 화려하게 차려입은 기생들에게 ‘축 명월관개업’이라고 쓴 띠를 두른 양산을 어깨에 걸치고 종로통 등 시내 번화가를 누비게 했다. 악공 출신의 연주자들이 신명 나는 곡을 연주하며 기생들의 뒤를 따랐다. 장안에는 이미 명월관에는 임금을 모시던 기생들이 손님을 모시고, 황제가 먹는 음식이 주안상에 나온다는 소문이 좍 퍼지고 있었다. 고관대작은 물론 장안의 내로라하는 한량들은 모두 명월관에 가보고 싶은 기대로 들떠 있었다. 개업 첫날부터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명월관은 문을 열자마자 명사와 부호들이 드나드는 최고급 사교장이 되었다. 대성공이었다. 지방에서도 유지들이 돈을 싸서 들고 몰려왔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건물증축을 거듭하다 인사동에 지점까지 내게 된다. 그 사이 안순환도 궁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전선사 장선과장을 역임하고 1910년에는 정3품 이왕직사무관에 오르지만, 국권피탈 후 물러나 명월관 경영에 전념한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무렵 민족대표 29인이 명월관 인사동지점에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지방에 체류하는 4인을 제외한 전원이 모인 것이다. 불교계를 대표하는 한용운이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행사가 끝날 무렵 손병희는 안순환을 시켜 경무 총감부에 연락하게 했고, 곧 일본 경찰 80여 명이 명월관으로 들이닥쳤다. 현장에 있던 민족대표들은 전원이 연행, 구속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안순환은 명월관 본점과 지점을 모두 매각하고 1921년에 식도원을 개업한다. 명월관은 장소를 옮겨 다니며 1948년까지 존속하였다. 안순환은 요리점 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했고 말년에는 유교 부흥을 위해 힘썼다. 명월관의 개점 초기에는 대한제국의 고관과 친일파들이 주로 출입하였으나, 후기에는 문인, 언론인들도 많이 드나들었다. 안순환이 고안한 교자상은 오늘날 한정식차림의 효시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우리 고유의 독상 차림을 훼손했다는 신랄한 비판도 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음식과 전통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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