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핵폭탄 가젯
1945년 2월 19일부터 약 1개월 동안 이오지마섬을 두고 미국과 일본의 격렬한 전투 가 벌어졌다. 이오지마는 도쿄에서 정남 쪽으로 1,216km 떨어진 서태평양 해상에 있는 아주 작은 화산섬이었지만, 일본 본토 바로 앞에 위치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일본 해군은 이곳에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건설했다. 이오지마 전투를 지휘한 해군 중장 이치마루 리노스케 제독은 뒤늦게 합류한 수비대 사령관 다다미치와 자리를 함께하였다.
“자네가 와주니 든든하네.”
“제독께서 잘 버텨 주셨습니다.”
미 태평양 함대는 미 해군 항공대와 미 육군 항공대, 해군 함정을 동원하여 1944년 6월부터 무려 아홉 달 동안이나 이오지마를 폭격했다.
“이미 제독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마리아나 해전에서 이미 우리 해군의 전력이 무 력화된 이상 이오지마 방어는 사실상 자살행위입니다. 다만,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 이고 본토가 전력을 재정비할 동안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최선입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다다미치 사령관은 최대한 오래 버티는 방어 전술을 주장했 다. 리노스케 제독은 육군 중장인 다다미치 사령관의 전술에 동의하며 전권을 넘겼 다. 다다미치 사령관은 해안 방어 진지보다는 땅굴을 만들어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 하였고 쓸모없는 전투는 최대한 줄이고 가능한 오랫동안 병력을 유지하며 버텼다. 이는 본토에게는 상당히 유효한 조치였지만, 이 때문에 이오지마는 일본군과 미군 양쪽 모두에게 끔찍한 지옥이 되었다. 다다미치 사령관의 새로운 전술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의 시작인 해안 상륙 시점부터 미군은 전혀 낯선 전황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군은 상륙에 앞서 전함들이 대구경 함포를 쏟아부었고, 항공모함 함재기를 동원 한 공습을 펼쳐 해안에 설치된 토치카나 방어선을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다다미치 사령관은 해안선 안쪽으로 병력을 빼내어, 거대한 땅굴로 연결된 탄탄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미군은 3일간 무자비한 포격을 가한 뒤 당당하게 상륙했으나 땅굴에 피신하고 있었던 일본군의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사실 이오지마에 배치된 일본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배수지진을 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지연전을 목표로 섬 전체를 요새로 만든 상황이었다. 미 육군 항공대는 일본 본토 폭격을 대비해 B-29 폭격기의 비상 활주로를 확보하고, 이오지마와 인접한 오키나와 점령을 위한 기착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 섬이 반 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제5 상륙군단장 해리 슈미트 해병 소장은 작은 섬인 이오지마를 점령하는데 일주일 정도면 문제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저 작은 섬에 병력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고, 숨을 데도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이오지마의 병력은 미국의 예상을 벗어났다. 육, 해군 4개 대대 7천여 명의 병력에다가 본토에서 사이판으로 파견한 보병과 전차 2개 연대가 미처 사이판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이판이 함락되는 바람에 갈 곳을 잃고 이오지마에 대기하게 됨으 로써 총 22,000명의 대규모 병력이 되었고, 사이판으로 가려던 전차, 대전차포, 대 공포 등 중화기로 인해 엄청난 화력까지 갖춘 상태였다. 그런 데다가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과 일본군 병사들을 총동원해 섬 전체에 땅굴 요새까지 구축했다. 일본군은 미군이 함포 사격을 할 때는 땅굴에 피해 있다가 포격이 멈추고 해병대의 진격이 시작되면 땅굴에서 나와 필사의 항전을 했다. 미군으로선 생각지도 못한 대규모 병력과 막강한 화력에 자신들의 예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미군 3개 해병사단이 해안선에 상륙하는데 해병들은 화산재 같은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며 대형 장비를 상륙시키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바로 그때, 일본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과 포병의 공격으로 인해 해안선에 상륙한 해병대는 혼란에 빠졌고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미군도 동굴 벙커를 향해 대포를 쏘면서 빗발치는 총알을 뚫으며 진격했고 총알이 부족한 일본군은 미 해병대의 필사적인 반격에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한다.
첫날에만 미해병대 2,500여 명이 전사하고 부상을 당하는 피해가 났지만 일본군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본군 22,000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4,000명도 채 안 되었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중상이었다. 결국 1주일 만에 끝난다고 장담했던 전투는 1개월 이상이나 지속된 끝에 미군은 일본군 보다 전사자가 더 많았지만 결국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뒤를 이은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미군은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다. 빠른 시일 내로 전쟁을 끝내야 했던 미국은 이오지마처럼 일본군의 처절한 항전으 로 미군이 막대한 피해를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일본 본토를 상륙하기 전에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완성된 리틀보이와 팻맨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기로 결정하였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캐나다가 참여한 핵폭탄 개발 계획이다. 계획은 극비로 진행된 군사 작전이었다. 원래 맨해튼 프로젝트는 나치 독일의 핵 개발을 우려하여 이를 선점하고자 미국과 영국이 공동으로 추진한 것으로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나치 독일이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이 임박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허가했고, 루스벨트 사망 후 트루먼 대통령은 최대한 빨리 핵폭탄 개발을 완료하도록 독려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나치 독일로부터 미국과 유럽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예산이 무한정으로 지원되었다. 미국 육군 공병대의 사령관이었던 유진 레이볼드 소장은 제임스 마셜 대령을 맨해튼 프로젝트의 군사 부문 수장으로 임명하였다.
수천 명의 세계 초일류 과학자들이 밤낮없이 연구한 결과, 1945년 7월 16일 뉴멕시 코주 앨라모고르도의 사막 지역에서 인류 최초의 핵폭탄 실험이 성공하였다. 핵폭 탄 이름은 가젯(gadget)으로 명명되었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미 본토가 공격당한 진주만 공습으로 그 당시 미국 여론은 악화되고 있었다. 나치 독일의 항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고 분위기에 들떠 있다가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본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다. 당시 미국 여론은 강력하고 상징적인 방법으로 미국답게 전쟁을 끝내자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리틀보이는 우라늄을 이용해서 만들어졌고, 팻맨은 플루토늄으로 만들어졌다. 리틀 보이는 2개의 우라늄 덩어리의 충돌로 핵분열을 일으켜 폭발하는 원리다. 1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다른 쪽 우라늄 덩어리로 발사하여 충돌시키는 구조이기 때문에 길 쭉한 모양이 되었다. 리틀보이는 간단한 원리로 불발의 우려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폭발 실험도 없이 바 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실제로 일본이 원자폭탄 실험장이 되었다. 앨라모고르도의 사막 지역에서 실험한 것은 팻맨 모델이다. 리틀보이보다 폭발력이 훨씬 강력하다. 팻맨은 비워진 중심부에 중성자원을 넣은 플루토늄 구체를 사방에서 압축시켜 폭발한다. 리틀보이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별명이었으며, 팻맨은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의 별명이었다.1945년 4월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은 원자폭탄을 투하할 장소를 선정하기 위해 타겟 위원회를 구성하고 먼저 선정 기준을 정했다. 그것은 첫째, 사방 지름 3마일(4.8km) 이상인 평탄한 지역이면서 상징적인 목표물이 있는 도시이면서 둘째로는 원자폭탄의 피해를 효과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곳이 어야 했다. 그리고, 셋째는 그동안 폭격을 받지 않은 도시이어야 했다. 그런데 타겟 위원회는 도쿄와 오사카, 나고야, 고베 등 일본의 주요 도시는 수백 대의 B-29 폭격기로 이미 폐허가 된 뒤였기 때문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고심하던 중에 타겟 위원회는 일본의 남은 도시 중에서 선정 기준에 부합하는 곳을 찾아냈다. 그곳은 바로 히로시마였다. 이어서 기타큐슈, 요코하마, 니가타, 그리고 교토까지 4곳이 추가되어 총 5곳의 타겟이 정해졌다. 타겟 1순위는 군수 창고가 밀집해 있는 히로시마와 교토였고, 나가사키는 아직 예비 후보 타겟이었다. 그런데 교토 투하에 대해서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이 제동을 걸었다. 스팀슨은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일본의 수도이자 문화유산이 많은 교토를 잿더미로 만든다는 것이 탐탁지 않아 교토를 타겟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스팀슨의 의견에 동의한 트루먼 대통령은 교토는 타겟에서 배제하도록 명령했 다. 결국 1945년 7월 교토 대신 나가사키가 새로운 5대 타겟에 추가되었다. 나가사키가 선정된 이유는 일본의 핵심 전쟁 지원 시설인 미쓰비시 중공업의 조선소와 인근에 일본 해군의 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으로 일본이 항복한다는 것이 미지수였기 때문에 미국은 원자폭탄을 추가로 만들어내는 대로 계속해서 투하할 계획이었다.
그로브스 장군은 1945년 8월에 3 개, 9월에 추가로 3개, 12월까지는 매월 7개를 만들어 투하할 계획이었다.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원자폭탄을 투하할 예정이었다. 히로시마는 일본에서 여덟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까지 폭격을 한번도 받지 않았다. 보급창 역할을 했던 히로시마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폴 티비츠 대령은 1945년 8월 4일 대원들을 소집하여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을 브리핑을 하면서 원자폭탄의 위력과 작전 개요를 공개했다. 제1 타겟은 히로시마, 이어서 고쿠라, 나가사키 순서로 총 3개 도시가 목표였다. 목표 지점의 기상 문제 등을 고려하여 제2, 제3의 예비 목표를 정해서 출격하기로 했다. 히로시마에는 예비 폭격기 1대를 포함하여 제393 폭격 비행대대 소속의 B-29 7대가 작전에 투입되었다.
기상관측기 3대는 폭격기보다 1시간 먼저 날아가 타겟의 날씨를 확인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받았다.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 에놀라 게이는 리틀보이를 싣고 마침내 역사적인 출격을 하였다. 실제 폭탄이 너무나 무거웠던 데다가 가득 채운 연료 때문에 티비츠 대령은 활주로 거의 끝에까지 가서야 겨우 이륙하였다. 1시간 먼저 출발한 기상관측기 3대는 각자의 목표 도시 상공에 도달했다. 그런데 히로시마와 고쿠라는 구름이 잔뜩 끼어 시계가 좋지 않았고, 제3 타겟인 나가사키는 청명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히로시마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히로시마로 간 기상관측기 스트레이트 플러시는 제1 타겟에 대한 폭격을 제안하였 고 이 보고를 수신한 에놀라 게이의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은 히로시마로 향했다. 약 1시간 뒤 오전 8시, 히로시마 중심부 아이오이 다리를 조준하여 리틀보이를 투하한 직후 전속력으로 기수를 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히로시마 상공 570m에서 리틀보이가 폭발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 시민들은 번쩍하고 엄청나게 밝은 흰색의 빛을 하늘 에서 보자마자 이어서 생전 들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폭발음을 들었다. 뒤이어 엄청난 폭풍이 주위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든 다음 화재가 들이닥쳤다. 화재는 히로시마 시내 중심부를 모두 삼키고 히로시마시 전체를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몇 시간 뒤 하늘에서 검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방사성 분진으로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려온 것이다. 이 검은 빗물은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받아 마셨다.
[팩션소설'블러핑'41]에서 계속...
[ '블러핑' 와디즈 펀딩]
[미드저니 와디즈 펀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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