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얼리 시장은 세계 5위권에 달한다. 그러나 정작 주얼리 시장의 주도권은 해외 명품 브랜드에 내주고 있다. K-팝과 K-드라마가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시대, K-주얼리는 안방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품질과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세계적인 브랜드를 키우지 못한 탓이다. 여전한 음성 거래와 디자인 베끼기, 영세한 운영 등이 K-주얼리 브랜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나 K-컬처의 약진과 함께 K-주얼리의 잠재력도 살아나고 있다. 실력 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새 바람도 일으키고 있다. 여성경제신문은 K-주얼리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고 있는 토종 브랜드를 응원하는 '주얼리즈' 시리즈를 시작한다. 주얼리즈는 '주얼리'와 '리즈 시절'의 합성어다. 지금이 리즈 시절인 신흥 K-주얼리 브랜드를 발굴해 국내 독자에게도 소개하고 세계시장으로 발돋움하는데 일조하려 한다. [편집자주] |
성남시 분당구의 한 단독주택 단지, 고요한 이면도로를 따라가다 좁은 개울을 건너면 야트막한 언덕 위 '김인자 칠보연구소'라 쓰인 검은색 간판이 보인다. 아기자기한 정원을 두르고 선 2층짜리 단독주택은 칠보 공예 전문가 김인자 디자이너의 전시관이자 작업실인 동시에 생활 공간이다.
칠보(七寶), 불교 경전에 나오는 극락세계의 일곱 가지 보석을 뜻한다. 칠보 공예는 금속 등의 재료에 유리질을 녹여 붙이는 과정을 거쳐 장식하는 전통공예 방식으로 작품에서는 전통적 조형미와 영롱한 색상이 특징적이다.
칠보 공예품은 유약을 올린 뒤 700~900°C 가마에서 구워내 만들기 때문에 반영구적으로 소장할 수 있다. 같은 형태에 같은 유약을 올렸다고 해도 완성품은 언제나 다른 색채를 띤다. 모든 칠보 공예 주얼리가 '세상에 단 하나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인자 디자이너가 칠보와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1956년생인 그가 서른다섯이던 시절 취미 활동을 하러 나갔던 문화센터에서다.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중학생,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고 있던 김 디자이너는 그 순간을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말했다.
―자기소개를 한다면.
"삼십 대 후반에 우연한 계기로 칠보를 알게 돼 34년간 몰두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문화센터에서 한국 칠보를 처음 배운 다음 동경예술대학교에서 일본 칠보도 배웠다. 지금은 나만의 칠보를 연구하고 있다. 칠보 관련 논문을 쓰려고 60세 넘어 대학원에 가기도 했다. 지금은 책을 쓰고 있다."
―취미로 칠보를 시작했으면 처음에는 변변한 작업실도 없었을 텐데.
"그렇다. 거실 바닥에다가 칠보용 전기 감아놓고 시작했다. 그런데도 밤 12시, 1시가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만들었다."
―동경예대는 어떻게 가게 됐나.
"취미로 열심히 칠보를 만들던 와중 일본의 칠보 장인을 만나게 됐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처음 그분의 칠보를 보고 나서 깜짝 놀랐다. 한국의 칠보와 너무 달랐거든. 물어보니 동경예대에서 칠보를 가르친다더라. 그래서 무작정 일본으로 갔다.
수업은 이바라키현에 위치한 토리대 캠퍼스에서 열렸다. 도쿄 중심부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이다. 버스 타고 전철 타고 또 버스를 갈아타고, 편도 2시간 이상 걸렸다. 그렇게 2주 동안 수업을 들으러 가면서 너무나 행복했다. 그때는 내가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 할 때였다. 마침 일본에 살고 있는 친언니를 동반해서 강의를 들으러 갔다.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어떻게 하는 건지 행동을 보고 배웠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칠보를 배웠나.
"그 선생님께서 동경예대에서 강의하는 날이면 꼬박꼬박 수업을 들으러 갔다. 10년간 도쿄에 간 것만 수십 번이다. 선생님께선 내가 너무 자주 오니까 '결혼을 안 했나 보다' 하고 오해하기도 했다더라."
―'김인자 칠보'를 개발했다.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칠보는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수됐지만 일본에서 훨씬 더 성행했다. 나고야에 가면 칠보 마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칠보 공예란 사장되다시피 했고 칠보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게 속상해서 '내가 좀 한국의 칠보 공예를 발전시켜 보자' 마음먹었다.
일본의 경우 전통 방식의 칠보 공예가 주류다. 나는 그렇게까지 전통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봤다. 칠보는 다양한 재료, 색, 기법으로 각자의 개성을 무궁무진하게 드러낼 수 있다. 현대적인 감각과 어우러질 때 예술품으로서 가치가 더 커질 것으로 생각했다."
―김인자 칠보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기존 칠보는 프레임에 칠보를 올리는 평면 작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내 작업물은 거의 다 입체다. 색이 투명하고 맑다는 것도 특징이다."
―독자적인 칠보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칠보를 겹겹이 올리면 무거워진다. 무거운 액세서리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나의 경우 칠보는 0.5mm 판에 올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0.1mm 판에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그럼 한 겹 올라갈 곳에 다섯 겹이 올라가면서도 무게는 그대로다.
나만의 색을 찾기 위해 은판을 몇 t은 썼다. 색을 올리고 굽고 버리고를 반복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장인들이 괜찮은 도자기를 만들고도 '이게 아니야'라면서 깨부수고는 하잖은가. 내가 그랬다. 남들은 '이거 괜찮은데 왜?'라고 말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버렸다."
―제작한 주얼리 중에는 보석이 박힌 작품도 많다.
"작품별로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칠보 주얼리라고 하면 한 점당 5만원에서 10만원 선에 거래된다. 나는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등 보석을 넣어가며 내 작품의 가치를 올렸다."
―열 개 넘는 특허와 디자인 등록증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 그중에서도 '칠보 기술 특허'를 가장 자랑하고 싶다.
―어떻게 칠보 기술 특허를 받았나.
"일본에서 배운 기술을 혼자 연습하다가 실패했다. '한번 뜯어나 보자'하고 옆을 뜯었는데 성태칠보처럼 나온 거다. 전통 방식의 성태칠보는 염화 제철이라고 하는 굉장히 독한 화학물질을 녹이는 작업인데 그걸 뜯으니 저절로 그 상태가 돼 있었다. 기존 성태칠보는 금속으로 된 밑판과 테두리가 있어야 한다. 금속 없이 칠보 유약으로만 만들어지기 때문에 원석에 준하는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다."
―지금도 특허를 취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여러 기법을 개발했지만 특허를 취득하지는 않으려 한다. 특허는 모두에게 공개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기술이 많아 특허 욕심은 별로 없다."
―문하생이 있나.
"칠보를 시작한 지 10년이 되자 배우고 싶다는 사람들이 꽤 생겼었다. 문화센터 세미나부터 시작해 종로 귀금속 거리 인근에 사무실을 얻어 이들에게 차근차근 전수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수강생을 더 이상 받지 않는다."
―왜 문하생을 받지 않는가.
"사실상 판로가 없다고 보면 되기 때문이다. 나야 채율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귀걸이, 목걸이, 브로치 등의 주얼리를 백화점 등에서 판매하고 있지만 나는 아주 특이한 케이스다. 이제 칠보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작품을 판매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칠보 공예는 시간도 재료비도 많이 들어간다. 취미 이상의 수준으로 가기 위해서는 작품이 곧 수입원이 돼야 하는데 한국에는 칠보 공예 수요가 너무 적다. 판로를 개척하려고 해봤지만 혼자 해서 될 일은 아니더라. 판매처 없는 상황에서 수강생을 늘리기만 하는 건 그분들께 피해를 주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석사학위를 취득했던 숙명여대 대학원 조형예술학과에서도 잠시 강의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흥미와 열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했지만 판로나 수요가 없다 보니 칠보 공예를 교양수업 이상으로 여기는 학생은 안타깝게도 없었다."
―좋은 주얼리는 어떤 주얼리라고 생각하나.
"사치품이 아닌 가치품으로 인정받는 주얼리. 착용했을 때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거기 깃든 시적 이야기가 있는 주얼리가 좋은 주얼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으로 국한해서 보자면 한국인은 명품 주얼리 소비를 많이 하는 편으로 알고 있다. 개성 있는 한국 주얼리가 많이 나오고 대중화되면 그것 역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롤모델이 있나.
"프랑스의 보석세공사 르네 랄리크. 다양한 재질을 활용해 경계를 뛰어넘는 디자인으로 인정받았다. 전통을 깬 혁신적 작업을 통해 아르누보 시대의 독보적인 존재가 됐다. 그 사람의 칠보 작업을 보면, 지금 봐도 저 시대에 어떻게 저런 작업을 했을지 놀라울 정도다. '한국의 르네 랄리크가 돼보자' 하는 생각을 늘 한다."
―작품에서 자연적 요소가 많이 보인다. 작품을 구상할 때 영감은 어디서 얻나.
"초등학생 때 발레를 배웠다. 무대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때 의상이 불빛에 반사되고 하늘거리던 모습이 기억 저편에 항상 남아있었다. 그 형상은 자연, 특히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과 닮았다고 어느 날 느꼈다. 꽃의 움직임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무용수의 몸짓과 비슷하다. 작품을 보면 꽃이 유난히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최근에는 실타래를 주제로 삼고 작업하고 있다. 얽히고설키고 맺고 풀고 끊고 이어가면서 살아온 인생의 실타래를 하나씩 엮는 기분으로. 얇은 은선을 가지고 혼자 묵상하면서 실을 감는다. 오늘은 어떤 실타래가 만들어지겠구나, 내일은 또 어떤 실타래가 만들어지려나, 이런 기대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자연을 잘 담은 작품을 소개한다면.
"설거지할 때 쓰는 수세미로 만든 작품이 있다. 수세미는 자연의 섭리와 조형 요소가 모두 담긴 좋은 재료다. 입체감도 있고 선과 선이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불에 비췄을 때 투영되는 빛이 너무 아름답다. 그냥 수세미로 조명을 만들었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작품이 됐겠지만 나는 여기에 은으로 주물을 떠 칠보를 올렸다.
철로 된 수세미 수백 개를 분해하고 만들고 꾸미고 하다 보면 손을 많이 다친다. 지문도 사라져버렸다. 행정복지센터에 서류를 떼러 갔는데 지문으로 본인 확인이 안 돼 어머니 아버지 성함과 본관을 묻더라.
지문은 없어졌지만 이타미에서 입선도 하고, 무엇보다 너무 아름다워 만족스럽다. 빛이 관통하며 보이는 섬세한 섬유 조직이 백미다. 은으로 주물을 뜨다 보니 돈도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 은으로 완벽한, 내 마음에 드는 주물을 뜨기 위해 2년을 매달렸다."
―만든 주얼리를 착용하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연예인이 있는가.
"배우 이영애가 잘 어울릴 것 같다. 동양적인 미모와 수수한 매력이 내가 만든 주얼리와 잘 어우러질 것 같다. 배우 손예진도 마찬가지다. 한복을 입고 내가 만든 주얼리를 착용한다면 특유의 투명한 느낌과 상응해서 참 아름다울 것 같다."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내 손끝에서 만들어진 색채의 조각들이 대중한테 어떠한 울림, 메시지를 주었으면 한다. 세계적인, 최고의 작가가 되고 싶다. 또 한국이 정말 아름다운 칠보를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고 싶다.
구체적으로는 박물관을 열고 싶다. 전시 공간을 지금보다 크게 확장하면 후배 양성하기도 쉬워지지 않을까. 문하생이 아니더라도 칠보 기법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하고 싶다. 방문객은 체험하고 장인은 옆에서 만들고, 곧바로 판매까지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팝업 스토어처럼."
―2024년 안에 완수하고 싶은 일정은.
"7월 첫 주에 성태칠보를 배우러 일본에 다녀왔다. 성태칠보는 과정이 복잡해서 제대로 만들려면 1주일가량 걸린다. 속성으로 배웠기 때문에 와서 보니 또 모르겠다. 선생님 도움 없이 완벽한 성태칠보를 만드는 것이 올해 목표다."
―마지막으로, 한국 주얼리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이 보완돼야 할까.
"칠보만의 문제는 아니고, 주얼리를 전공한 학생들이 자기 브랜드 차리고도 판매가 안 돼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주얼리 산업을 이끌어가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정부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래야 한국 주얼리의 명맥이 끊기지 않는다.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대상도 좀 넓혀야 한다고 본다. 나이 많은 분 중에서도 장인 정신을 가지고 한국 주얼리, 공예에 온 힘을 다하는 분들이 많다. 이분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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