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한 연구에서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노인들에게 건강에 관해 묻는 초점 집단토론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관절염 등의 만성질환을 최소 한 두 가지 이상 보유한 대부분의 노인들은 질병이 있어도 "내 다리로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상태" 또는 "내 손으로 밥을 떠먹을 수 있는 상태"를 '존엄한 상태'라고 여겼다. 질병을 가진 몸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면서도, '밥숟가락 뜰 수 없는 몸'에 대한 연민과 동정, 나아가 혐오의 시선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분들은 왜 이런 시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오늘은 노인들이 의존성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탐색한 질적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논문 바로가기: 지위로서의 의존성: 노인들이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의학, 간호학에서는 의존성을 개인이 수행할 수 있었던 일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 일시적 또는 만성적인 기능 장애로 간주하며,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 가능한 상태로 본다.
하지만 의존성을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구성된 개념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서구적 맥락에서는 독립성이 의존성의 반대 개념으로 강조되며 바람직하게 여겨지지만, 오늘 소개하는 논문의 연구진은 노인들이 인식하는 독립성과 의존성의 개념이 이분법적이지 않고 더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연구진은 아일랜드 더블린 지역에서 수행한 연구를 통해 노년기 '지위로서의 의존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출하였다. 연구진은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사회적 자본 개념을 활용해 '연령 자본(age capital)'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상징 자본(사회적 지위 표지)을 제시하고, 노인들이 의존성과 독립성을 각각 긍정적 지위나 자부심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상징적 상호주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또한 미국 사회학자 고프먼의 정체성 구성 이론을 적용하여 초점집단토론이라는 '전면 무대'에서 노인들이 의존성과 독립성을 각각 어떻게 활용하고 표현하는지를 분석하는데, 특히 일부 노인들이 '의존적' 돌봄 수혜자라는 낙인찍힌 지위와 대비되는 '독립적' 지위를 내세우는 방식에 주목한다.
이 연구는 돌봄 서비스의 문제들을 파악하기 위해 수행된 유럽 공동 연구의 일환으로 수집된 전체 자료 가운데 아일랜드에서 재가 서비스를 이용하는 지역사회 거주 노인들이 참여한 초점집단토론의 결과를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분석에 사용된 토론은 총 9회였으며, 각 토론에는 3~7명이 참여하여 총 46명의 노인이 토론에 참여하였다. 토론에 참여한 노인들은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무료 또는 보조금이 지원되는 재가 서비스 이용자들이었다.
각 토론 집단의 구성원들은 같은 지역에 거주하거나 특정 센터, 모임에 참석하는 등 이전부터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 연구진은 이를 참가자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설명한다. 토론 내용은 근거이론에 따라 코딩과 분석이 이루어졌고, 최종적으로 '지위로서의 의존성'이라는 핵심 범주를 도출하였다.
이 연구는 노인들이 의존성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핵심 범주로 분석하였다.
① 사회적 자본의 이용: 가족이나 전문 돌봄 제공자의 존재는 노인들이 의존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중요한 사회적 자본으로 작용하였다.
② 연령 자본을 통한 의존의 정당화: 노인들은 고령이라는 나이 자체와 건강 상태 악화, 그리고 오랜 시간 가정과 국가에 경제적 기여를 해왔기 때문에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꼈으며, 이를 연령 자본으로 정당화하였다.
③ 지위로서의 의존성을 표현하는 노인: 많은 노인들이 가족과 돌봄 제공자의 도움을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이를 사회적으로 명예로운 의존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개별화된 돌봄(각별한 보살핌의 '대상'이 되는 것)을 통해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④ 지위로서의 독립성: 일부 노인들은 자립에 자부심을 느끼며 도움을 거절하거나 필요에 따라 도움을 선택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노인들이 의존성과 독립성을 사회적 지위와 상징 자본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또한 노년기 의존성이 서구적 개념처럼 항상 부정적이거나 단순히 수용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받는 지위로 전환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노인들은 사회적 자본과 연령 자본을 통해 일정 수준의 의존과 돌봄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긍정적 지위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이러한 자본이 부족한 경우라면 의존성이 긍정적으로 해석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연령 자본은 오랜 공로와 삶의 성취라는 조건 하에서 돌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끼게 하는 상징적 자산이었다. 돌봄 서비스의 민영화와 노화에 대한 개인 책임이 강조되는 오늘날 사회적 맥락에서는 사회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단이 이러한 상징 자본을 더 쉽게 획득할 수밖에 없다고 연구진은 경고한다.
이에 대하여 돌봄 활동가 조한진희는 <돌봄이 돌보는 세계>(2022, 동아시아)에서 의존과 돌봄, 약자화는 권력이 작동하는 영역이라고 설명한다. 과거 왕은 성인이 되어도 하인들이 옷을 입혀주었고, 귀족들은 이동할 때도 하인들을 대동해서 늘 돌봄을 받았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의존은 그들을 약자화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많이 의존할수록 더욱 큰 권력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경제적 배경과 무관하게 모든 노인이 동등하게 돌봄을 받는, '지위로서의 의존성'을 향유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연구는 우리에게 의존을 둘러싼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왜 한국 사회는 노인의 의존성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하는 부정적인 상태로, 독립과 자립은 그 반대에 위치시키며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게 되었을까? 한국 노인들은 사회적 자본으로 전환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돌봄을 충분히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철학자 에바 키테이는 생애주기에 따라 의존의 정도가 다를 뿐, 절대적인 독립 상태에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제대로 된 사회라면 '불가피한 의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 속에서 정도는 다르지만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건강한 몸의 생산성을 기본값으로 상정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느라 이 보살핌에 대한 필요와 욕구를 애써 숨기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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