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호 실패연구소장 "실패 경험 통해 회복탄력성 키워야"
(대전=연합뉴스) 박주영 기자 =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딘즈'(KAIST 전기·전자공학부에서 매 학기 3% 이내의 탁월한 학업 실적을 보인 우수 학생에게 수여하는 상)는 마땅히 제 차지라고 생각했었죠."
지난 13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망한 과제 자랑대회 행사장.
행사장에 '과제 채무 파산핑'이라는 부스를 차린 KAIST 전자과 '5학년' 허도영 군은 방문한 학우들에게 '과제 총 219일 밀린 썰 푼다'를 주제로 자신의 실패담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과학고를 졸업해 수시로 한 번에 KAIST에 입학했고, 뛰어난 이공계 영재들이 모인 학교에서 4년 내내 높은 학점을 받았다.
자신이 속한 연구실이 노벨상을 받으며 졸업하는 꿈을 꾸던 그때,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 나타났다.
'실패'와는 거리가 먼 완벽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밥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 몸이 아팠고, 공부는커녕 출석도 하지 못했다. 중도 포기하는 수업들이 늘어났고 결국 졸업이 연기됐다. 서울에 있는 회사에 인턴으로 합격했지만, 포기하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무엇보다 자신을 괴롭게 한 것은 그녀의 완벽한 남자친구를 보며 느낀 자격지심과 열등감이었다.
가족과 친구, 심지어 교수님께까지 찾아가 울며 하소연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불현듯 "전국 어디에나 있는 학원 간판, 확실한 수강생 수와 수강 후기, 오랜 강의 '짬바'를 가진 최고의 일타 강사가 계시지 않은가"하는 깨달음을 얻었고, 주님께 기대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방학 동안 30개가 넘게 쌓인 과제의 우선순위를 정해 하나씩 해결해 나갔고, 도합 219일 밀린 모든 과제를 제출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인생 최악의 학점을 받았지만, 그동안 자신도 모르는 변화가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밀린 과제를 하느라 쇼츠, 릴스, 인스타, 유튜브를 끊으면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늦게 낸 과제 중 하나가 교수님의 눈에 띄어 연구 논문으로까지 이어졌다.
이전 회사보다 더 좋은 조건의 회사에 인턴으로 취직됐으며, '짝녀'보다 몇 배는 더 후광이 빛나는 사람을 만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허 군은 "내가 이렇게나 부족한 데도 힘들 때 도와준 사람들이 있고, '그 분'은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하신다는 생각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며 "지금 고난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 감사가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부스를 관람한 학우들은 자신의 '짠한' 개인사를 진솔하게 털어놓은 허 군을 격려하며 박수를 보냈다. 공대생답게 알고리즘 순서도와 각종 합성 사진과 밈으로 고난을 재치 있게 표현한 PPT 자료도 관중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날 허 군을 포함해 8명의 구성원이 각자 자신의 실패 사례를 청중과 공유했다.
의대 증원 확대가 이공계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려다 의료 파업의 여파로 인터뷰를 하지 못해 과제 수행 기간 내에 끝내지 못한 사례, 두 달 동안 15차례의 실패 끝에 처음으로 유전자증폭(PCR) 테스트에 성공한 사례 등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허군이 1등인 최상을 받았고 '화려한 비상', '내 마음의 치명상', '당신은 상상 그 이상', '어딜 보시는 거죠, 그건 제 잔상' 등 절반이 넘는 참가자에게 상이 수여됐다.
KAIST 실패연구소가 주관해 올해 두 번째로 열린 이날 행사는 실패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고 학생들에게 도전 정신을 장려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조성호 KAIST 실패연구소장(전산학부 교수)은 "지난해 처음으로 행사를 열고 학생들에게 실패에 대한 에세이를 쓰게 했는데, 큰 위로가 됐다는 반응이 쇄도해 정례화하게 됐다"며 "상사나 선생님과의 관계에서는 치부를 드러내기 쉽지 않지만, 학우들끼리는 스스럼없이 실패를 공유하며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는 반응이었다"고 전했다.
일례로 교정에 많은 푸른 잎으로 우거진 나무 중에서 시든 잎 하나가 자기 모습 같다고 표현한 친구가 있었는데, 다른 친구가 포스트잇에 '무리를 짓지 않고 따로 있는 거위가 내 모습 같다'고 포스트잇에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조 교수는 경쟁적인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압축적인 근대화의 경험이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를 만드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저도 조금 전에 프로젝트를 하고 왔지만, 여전히 실험은 진척되지 않았고 오늘도 역시 실패하는 경험을 했다"며 "교수라고 하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여기지만, 하루하루가 실패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프로젝트가 쉽게 성공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데도, 학생들에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아무리 해봐야 가 닿지 않는다"며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것조차 '점수'로 기록하는, 모든 것을 점수화하는 교육 환경에서 실패의 경험을 자연스레 여기기란 쉽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과학계도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고들 얘기하지만, 큰 성공을 위해서는 많은 실패가 누적돼야 한다"며 "실패와 거절의 경험을 통해 회복탄력성을 키움으로써 새로운 도전을 향한 힘을 얻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j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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