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도 싫고 승진도 싫다" 좌절·불신이 낳은 무기력 신드롬

"열심히도 싫고 승진도 싫다" 좌절·불신이 낳은 무기력 신드롬

르데스크 2024-11-13 12:08:55 신고

3줄요약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 승진을 거부하는 이른바 '의도적 언보싱(conscious unbossing)'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그 배경에 '좌절과 불신' 심리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해도 삶이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좌절감,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합쳐져 "적당히 버티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 것이다.

 

이러한 '적당히' 심리는 국경을 넘어선 경쟁 구도 속에서 생존을 가로 막는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지목됐다. '적당히'라는 것 자체가 사실상 정체된 상태를 추구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성장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의 경쟁력과 직결된 내부 직원들이 현 상태 유지에만 몰두하게 된다면 종국엔 도태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희망사항➞기피대상' 평가 달라진 기업의 별…"딱 쓸 만큼만 벌고 내 인생 집중 할래요"

 

과거 모든 직장인의 희망사항으로 여겨졌던 '승진'이 지금은 기피 대상으로 전락했다. 잡코리아가 지난해 MZ세대(1980~2000년생,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직장인 1114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4.8%가 "임원 승진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이유로는 △책임져야 하는 위치가 부담스러워서 43.6% △임원 승진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아서 20% △임원은 워라밸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 13.3% 등의 순이었다.

 

▲ 출처 : 잡코리아 [그래픽=김문우] ⓒ르데스크

 

외국의 직장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로벌 채용 컨설팅 기업 로버트 월터스가 Z세대(1997~2012년 출생자)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2%가 '중간 관리자가 되길 원치 않는다'고 답했다. 중간 관리자는 팀장·부장 직급으로 실무자와 최상위 관리자의 다리 역할을 맡는다. 중간 관리자를 거부한 이유로는 '스트레스 지수가 높고 보상은 낮다'는 점이 꼽혔다.

 

이러한 '승진 기피' 현상은 수년 전 등장한 '조용한 사직' 열풍의 연장선상에 놓인 결과로 분석됐다. 앞서 코로나19 펜데믹 시기를 전후로 전 세계적으로 '일은 조용히 최소한만 하되 개인의 삶에 집중하겠다'는 의미의 '조용한 사직'이 유행처럼 퍼졌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10명 중 1명이 "주어진 업무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서울 마포구 소재 한 중소기업에 재직 중인 김미나 씨(28·여·가명)는 "요즘 주변을 봐도 예전처럼 승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내던지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나도 그렇고 다들 요즘엔 딱 쓸 정도만 벌면 피곤하지 않게 회사생활 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회사 임원들을 보면 거의 일과 삶의 구분이 없는데 그런 임원이라면 하라고 해도 거부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목숨 걸고 악작같이 일해도 어차피 내 집 못 사고 오히려 직업안정성만 낮아져"

 

▲ 한 지자체가 개최한 청년취업박람회 현장. [사진=뉴시스]

 

다수의 전문가들은 '승진을 거부하는 심리'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좌절감과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천정부지 치솟는 물가와 집값으로 임원이 되도 내 집 하나 사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보니 굳이 고생해서 임원이 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생겨났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올해 3분기 기준 주택 중위 가격은 6억7000만원이고 서울 직장인 연평균 근로소득은 약 4900만원이다. 평범한 직장인이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선 한 푼도 안 쓰고 13년을 꼬박 모아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돈을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거비, 식비, 교통비, 통신비 등 고정 지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월급 인상분이 물가 상승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엔 돈을 모으기 더욱 어려운 게 현실이다. 결국 직장인 한 달 평균 지출액이 약 120만원 가량이라는 한 설문조사 결과를 감안했을 때, 현실적으로 서울 직장인이 내 집 마련을 위해서는 20년 가량이 소요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서울소재 한 대기업에 재직 중인 황선우 씨(31·남·가명)는 "얼마 전 신문에서 월 200만원씩 모아도 서울에 내 집을 사려면 20년 넘게 걸린다는 기사를 봤다"며 "현 시점에서 한 달에 고정 지출, 생활비 등 200만원 가량을 쓰는데 내 집 마련만 포기하면 지금 월급으로도 충분히 쓰고도 남는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내 집 마련 계획만 없다면 지금보다 굳이 열심히 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며 "어차피 20년 동안 모은다 해도 지금보다 집값이 더 오를텐데 가능성 낮은 미래 때문에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 출근 중인 직장인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사회와 경제, 그리고 회사에 대한 불신도 '승진 거부' 심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됐다. 대내·외 불확실성 확대로 구조조정, 정리해고, 임원감축 등의 조치가 잇따르자 "고생해서 임원에 올라봤자 잘릴 확률만 높아질 뿐이다"며 임원에 대한 회의적인 평가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대신 반대급부로 "정규직 신분인 만년 부장 오래 버티는 게 최고"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

 

경기도 소재 한 중견기업에 재직 중인 김중근 씨(37·남)는 "요즘엔 대다수가 아주 좋은 조건이 아니라면 무조건 부장으로 오래 버티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 상황인데 처우가 조금 나아진다고 한들 누가 안정적인 정규직 대신 불안한 계약직을 선택하겠나"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 봐도 다들 임원 욕심이 없으니 굳이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며 "갓 취업한 신입일수록 더욱 심하다"고 부연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요즘 직장인들의 승진 거부 심리는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 먹는 심각한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기업 경쟁력의 핵심인 직원들이 성과 대신 보신에만 열중하게 된다면 결국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승진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현 상태로 유지하겠다는 일종의 '보신주의'에 가까운데 조직 내 이런 심리가 만연하면 결국 혁신이나 도전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며 "기업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라도 어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지 싶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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