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국가 경쟁력 강화 위한 사활 건 각국
반도체를 비롯해 2차 전지, 디스플레이 등 첨단 기술을 둘러싼 주요국 간의 패권전쟁이 격화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각 정부는 자국 중심의 글로벌 시장 재편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는 중이다. 한국 역시 첨단 기술 육성을 통해 국가 경쟁력 유지가 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받으며 민관이 힘을 합쳐 첨단산업 제패에 나선 상태다. 특히 내년 첨단예산 지원을 크게 확대해 글로벌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는다는 전략이다.
최첨단 반도체 생산량 20% 목표로 하는 미국
가장 적극적인 곳은 미국이다. 미국은 2022년 ‘반도체 칩과 과학법’을 제정해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설비 투자를 장려하고 있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기업에 반도체 생산 보조금으로 총 390억 달러, 연구개발(R&D) 지원금으로 총 132억 달러 등 5년간 총 527억 달러를 지원한다. 이를 통해 2030년까지 전 세계 최첨단 반도체 생산량의 20% 차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실제 미국 상무부는 지난 9월 반도체법에 따라 ‘폴라 반도체’에 1억 2,300만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첫 번째 보조금 지원 사례가 나왔다. 폴라 반도체는 자동차와 방위시스템, 전기 그리드 등에 필요한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이번 보조금 지급으로 폴라 반도체는 미네소타주 블루밍턴에 있는 생산시설의 반도체 생산 용량을 2년 내 거의 2배로 확대하고, 160명 이상을 고용할 전망이다.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은 “이번 발표는 반도체법에 대한 ‘새로운 단계’를 나타낸다”고 밝혔다. 상무부는 “이번 지원은 폴라 반도체를 외국 소유의 제조업체에서 미국 소유의 상업용 파운드리로 전환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폴라 반도체의 웨이퍼 생산량을 월 2만개에서 5만개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민간, 주, 연방 등으로부터 모두 5억 2,500만 달러 이상의 투자를 촉진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네소타주는 폴라 반도체에 7,500만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보조금 지급 조건으로 중국과의 거래에 제약도 뒀다. 이를 통해 글로벌 시장의 중국 영향력 확대를 억제하는 한편 전반적인 주도권을 가져가겠다는 방안이다.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도 마련해 2차 전지 분야에도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한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외치며 자국 반도체산업의 자생력을 키워나가는 중이다. 특히 미국의 견제에 대응해 올해 3,440억 위안 규모의 반도체 투자펀드(3기)를 조성했다. 지난 1기 펀드(1,400억 위안)와 2기 펀드(2,000억 위안)를 합친 것보다 많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중국 내 사회자본 투자를 촉진해 약 1조 5,000억 위안 규모의 자금이 반도체산업에 유입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울러 최근 미국 정부가 중국에 첨단 반도체 수출을 금지하자 중국은 자국 기업에 엔비디아의 H20칩 구매를 막고 자국 칩 사용을 독려하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국산 AI칩 경쟁력을 높여 기술 자립을 이루려는 취지로 풀이된다.
또한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도 대규모 지원을 이어가며 LCD에 이어 OLED 등 차세대 패널의 1위 탈환을 목표로 한다. 공장 건설 단계에서 비용의 30~50%를 보조금으로 지원하고 생산량 증대 단계에서도 국책은행을 통해 보조금을 지급한다. 실제 디스플레이 기업들이 부담해야 하는 자금은 총 투자액의 20%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한편 일본은 경제산업성(METI) 산하 신에너지·산업기술 종합개발기구(NEDO)에서 별도의 ‘반도체 지정 펀드’를 통해 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한다. 또한 세계 최대 파운드리(위탁생산) 반도체 제조업체인 대만 TSMC에 약 10조 원이 넘는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에 두 개의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TSMC를 보유한 대만은 지난해 1월 ‘산업혁신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반도체 등 첨단 기업들의 연구개발(R&D) 비용에 대해 25%를 공제하는 게 골자다. 이 외에 유럽연합(EU)는 430억 유로 규모의 반도체 법에 합의했다.
속도감 있고 적극적인 지원 필요하다는 지적
세계 각국이 천문학적인 투자에 나선 만큼, 한국 역시 첨단기술을 육성해야 글로벌 분쟁 속에서 국가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8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에서 ‘제1차 국가전략기술 육성 기본계획’을 발표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9월 ‘국가전략기술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처음 나온 중장기 계획이다.
1차 기본계획의 핵심은 과학 기술 주권 확보다. 기술 개발에 뒤지게 되면 단순히 하나의 산업 분야를 잃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 산업 전반의 약화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속도’와 ‘글로벌 협력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과학 강대국들을 빠르게 따라잡으면서 동시에 힘을 합쳐 글로벌 선도국으로 나서겠다는 전략이다. 현재 세계 선도 수준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차세대 통신 외에 AI, 첨단 바이오, 차세대 원자력 등 추격 중인 기술 3개를 추가적으로 선도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걸 목표로 삼았다.
재정적·제도적 지원에도 나선다. 5년간 민간 수요를 바탕으로 연구개발(R&D) 지원에 30조 원 이상을 투입할 예정이다. 이에 발맞춰 산업통상자원부는 내년 예산안을 11조 5,010억 원으로 편성했다. 전년대비 0.2% 늘어난 것에 그치지만 반도체와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등 첨단전략산업 육성과 지원을 위한 예산은 2024년 1조 7,805억 원에서 2025년 2조 8,94억 원으로 17.3% 확대 편성했다.
반도체의 경우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를 뒷받침하고자 저리대출 프로그램 2,500억 원, 생태계 조성 펀드 300억 원 지원 사업을 신규로 추진한다. 배터리는 안정성을 높이는데 주력하기로 했고, 디스플레이는 OLED 이후의 차세대 기술로 주목받는 무기발광 디스플레이 기술개발을 본격 추진한다.
하지만 보다 속도감 있고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도체의 경우 정부가 미국의 ‘칩스법’과 유사한 한국판 칩스법을 내놓았으나 올해 말 일몰될 예정이어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법안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K-칩스법’은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시설에 투자하는 대기업과 중견기업에 15%, 중소기업에 25%의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는 지난 7월 세법개정안을 발표할 당시 K-칩스법 적용기한을 2027년 말까지로 3년 연장하기로 했지만 아직까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상태다.
직접적인 보조금도 혜택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해외 국가가 반도체 분야에 직접적인 보조금을 통해 지원 효율성을 높이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 정부는 세제혜택이 보조금 지원과 마찬가지라며 직접적인 보조금 지원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2차 전지 산업에도 보조금 지급 정책은 현재까지 없는 실정으로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등 한국 배터리 3사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21년 30.2%에서 2023년 23.1%로 불과 2년 만에 7.1%포인트 하락했다.
첨단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경제안보의 관점에서 적극적인 ‘리쇼어링’을 유치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첨단산업 투자액의 50%까지 한도 없이 지원하는 외국인 투자 정책과 달리 리쇼어링 보조금 한도액은 수도권 150억 원, 비수도권 300억 원에 불과하다. 2022년 국내 유턴기업 24개 중 스마트폰 제조 등 첨단기업은 6개, 중견·대기업은 9개 사에 불과했다.
반도체산업은 그동안 한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10.2%에서 최근 20%를 넘어섰다. 반도체 수출의 증감에 따라 경상수지마저 크게 요동칠 정도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첨단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여러 방안들이 절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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