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을 대변해 싸워왔던 전태일은 자신들의 권리이자 고용주의 의무인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호소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이날 이 사건으로 전태일은 착취와 폭력, 혹사 등에 저항하던 노동자들과 오늘날까지의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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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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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생애를 다룬 '전태일 평전' 등에 따르면 전태일은 함께 공장에서 일하던 여공의 심한 기침과 각혈을 본 이후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평소 차비를 털어 배를 곯는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는 등 여동생처럼 여공들을 챙겨왔다. 전태일은 피를 토하는 여공을 병원에 보내달라고 요구했지만 '대체품'에 불과했던 여공은 이내 해고됐다.
큰 충격을 받은 전태일은 본격적인 노동 운동에 나섰다. 그는 환풍기가 없어 먼지가 쌓인 닭장 같은 작업환경, 한 달 동안 이틀도 채 쉴 수 없는 근무 일정, 박봉 등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전태일은 이곳저곳에 물어가며 근로기준법을 독학했고 1969년 6월 '바보회'를 설립하며 평화시장 공장 등에 노동환경 개 선을 요구했다. 이후 당연하게도 공장에서 해고된 전태일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보내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길이 없던 전태일은 결국 분신을 결심한다. 그는 청계천 일대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린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등의 말을 남긴 채 끝내 쓰러졌다. 그는 의료원(현 국립의료원)으로 후송됐으나 끝내 사망했다.
생명이 끊어질 듯한 와중에 전태일은 어머니와 친구를 향해 "내가 못다 이룬 소원들을 엄마가 대신 이뤄주세요" "내가 뚫어 놓은 작은 바늘구멍을 자꾸 넓혀서 그 벽을 허물어야 한다" "친구들아 절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달라" 등의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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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맞섰던 전태일… 평화시장에 생긴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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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의 분신 전후로 나뉠 만큼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신이 기계가 아닌 사람임을 깨달은 전국 노동자들은 노동조건 개선 요구를 외쳤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평화시장에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를 고문으로 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생겼다. 고인의 뜻을 이어받은 이소선씨는 여러 차례 구속을 당하고 옥살이를 하면서도 전태일의 뜻을 지켰고 2011년 별세 전까지 노동운동을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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