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기준법 준수하라"… 불꽃이 된 청년의 외침 [오늘의역사]

"노동기준법 준수하라"… 불꽃이 된 청년의 외침 [오늘의역사]

머니S 2024-11-13 07:02: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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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13일 노동환경 개선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던 22세 청년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사진은 tvN 유튜브 채널 '어쩌다 어른 2' 방영분 중 일부로 전태일의 손글씨와 사진. /사진=tvN 캡처 1970년 11월13일 노동환경 개선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던 22세 청년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사진은 tvN 유튜브 채널 '어쩌다 어른 2' 방영분 중 일부로 전태일의 손글씨와 사진. /사진=tvN 캡처
1970년 11월13일. 당시 22세 청년 전태일이 분신했다.

노동자들을 대변해 싸워왔던 전태일은 자신들의 권리이자 고용주의 의무인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호소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이날 이 사건으로 전태일은 착취와 폭력, 혹사 등에 저항하던 노동자들과 오늘날까지의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이 됐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생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재봉사로 일하던 전태일이 노동환경에 부조리함을 느낀 끝에 분신을 결심했다. 사진은 전태일 기념관이 제공한 전태일(오른쪽)의 생전 모습. /사진=전태일 기념관 제공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재봉사로 일하던 전태일이 노동환경에 부조리함을 느낀 끝에 분신을 결심했다. 사진은 전태일 기념관이 제공한 전태일(오른쪽)의 생전 모습. /사진=전태일 기념관 제공
전태일은 1948년 경북 대구부(현 대구) 남산동에서 재봉사인 아버지 전상수씨와 어머니 이소선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전태일은 17세에 상경해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재단 보조로 취직해 재단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생애를 다룬 '전태일 평전' 등에 따르면 전태일은 함께 공장에서 일하던 여공의 심한 기침과 각혈을 본 이후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평소 차비를 털어 배를 곯는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는 등 여동생처럼 여공들을 챙겨왔다. 전태일은 피를 토하는 여공을 병원에 보내달라고 요구했지만 '대체품'에 불과했던 여공은 이내 해고됐다.

큰 충격을 받은 전태일은 본격적인 노동 운동에 나섰다. 그는 환풍기가 없어 먼지가 쌓인 닭장 같은 작업환경, 한 달 동안 이틀도 채 쉴 수 없는 근무 일정, 박봉 등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전태일은 이곳저곳에 물어가며 근로기준법을 독학했고 1969년 6월 '바보회'를 설립하며 평화시장 공장 등에 노동환경 개 선을 요구했다. 이후 당연하게도 공장에서 해고된 전태일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보내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길이 없던 전태일은 결국 분신을 결심한다. 그는 청계천 일대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린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등의 말을 남긴 채 끝내 쓰러졌다. 그는 의료원(현 국립의료원)으로 후송됐으나 끝내 사망했다.

생명이 끊어질 듯한 와중에 전태일은 어머니와 친구를 향해 "내가 못다 이룬 소원들을 엄마가 대신 이뤄주세요" "내가 뚫어 놓은 작은 바늘구멍을 자꾸 넓혀서 그 벽을 허물어야 한다" "친구들아 절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달라" 등의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죽음으로 맞섰던 전태일… 평화시장에 생긴 노동조합

전태일의 사망으로 어머니 청계전 평화시장에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생겼다. 사진은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씨. /사진=전태일 기념관 제공 전태일의 사망으로 어머니 청계전 평화시장에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생겼다. 사진은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씨. /사진=전태일 기념관 제공
후에 공개된 전태일의 일기장에는 "이 결단(분신)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라며 "나는 돌아가야 한다.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라는 글이 공개됐다. 전태일은 죽음의 공포보다 도시 빈민이 쏟아졌던 1960년대 노동환경 개선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의 분신 전후로 나뉠 만큼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신이 기계가 아닌 사람임을 깨달은 전국 노동자들은 노동조건 개선 요구를 외쳤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평화시장에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를 고문으로 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생겼다. 고인의 뜻을 이어받은 이소선씨는 여러 차례 구속을 당하고 옥살이를 하면서도 전태일의 뜻을 지켰고 2011년 별세 전까지 노동운동을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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