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달리기에 관해 말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우리가 달리기에 관해 말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에스콰이어 2024-11-13 00:00:02 신고

달리기 얘기를 하려니까 어쩔 수 없이 무라카미 하루키 씨 얘기를 해야겠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가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인류 역사상 마라톤을 서른 번 이상(적어도 내가 세어본 것만 따져도 그렇다) 완주한 러너 중에 가장 많은 부수의 소설책을 펴낸 작가인 것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달리기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라면 조이스 캐럴 오츠도 있잖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하지만 누구보다 달리기를 사랑했기에 ‘문학적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면 문학의 발을 먼저 움직이세요’라는 멋진 제목의 달리기 산문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하기도 한 그녀 역시 무라카미 씨처럼 매주 다섯 번 이상 10km를 달리고, 한 달에 400km의 이정표를 세우는 크레이지 러너는 아니었다. 청소년 시절 국가대표급 러너였고, 57세의 나이에 1마일을 5분 15초에 달린 맬컴 글래드웰도 있지만 그는 소설가도 아니고 선수 출신이니 일단 논외로 하자.
하여튼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1996년 6월 23일 홋카이도의 사로마 호수 변을 달리고 있었다. 그가 달려온 거리는 무려 55km. 풀코스 마라톤인 42.195km를 훌쩍 넘어 달렸건만 그의 앞에는 아직 45km나 달려야 할 길이 남아 있었으니, 그가 달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100km를 완주하는 일명 ‘사로마 호수 울트라마라톤 대회’였기 때문이다. 1년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무라카미 씨지만, ‘울트라’의 경험은 이때가 처음이었던지라 55km를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느슨하게 돌아가는 육류 다지는 기계 속을 빠져 넘어가는 쇠고기와 같은 기분’ ‘자동차의 사이드브레이크를 힘껏 당긴 채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심폐와 근력이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을 이보다 근사하게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불과 한 달 전인 9월 28일 제주 북동쪽의 보석, 코난비치의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던 나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발목은 납덩이를 달아둔 듯 무거웠고, 장딴지는 바늘로 찌르면 터질 듯 팽팽했다. 숨을 고르게 쉬려 노력해봤지만, 한 번 헐떡이기 시작한 호흡은 속도를 늦춰도 돌아오지 않았고 평년보다 한참 길었던 마지막 여름 태양의 햇살 아래 피부는 발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무라카미 씨의 표현대로 민스 머신 속의 쇠고기, 사이드브레이크를 건 채 달리는 르망 레이서가 된 심정이었지만, 나는 한발 한발 내딛었다. 한 발을 내딛고, 또 다른 발을 내딛기만 하면 된다. 나는 달리는 기계다. 기계는 포기하지 않는다. ‘기계는 부서질 뿐’이라고 멋진 마음을 먹었지만, 너무 비장한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죄송하다. 나는 무라카미 씨처럼 55km를 달려온 것이 아니었고, 아마 고작 4km 정도를 달렸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고작 4km를 달려놓고 ‘나는 달리는 기계’라고 뇌까렸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한심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그리 창피하지 않다. 무라카미 씨가 55km나 달리고 나서야 경험할 수 있었던 마라톤을 넘어서는 달리기의 고통을 고작 4km를 달리고 깨달았다니 이 얼마나 경제적인 육체란 말인가”라며 요새 유행한다는 원영적 사고를 돌려보지만, 장원영 씨가 아닌 보통 한국 남성의 속마음은 금세 다시 좌절감으로 물들어갔다. 게다가 그건 대회였다. 나이키는 지난 9월 4명으로 이뤄진 남녀 720개 팀 중 예선을 거쳐 70개 팀을 선발하고 이들을 제주도로 실어 나른 뒤 코난해변에서 ‘나이키 런 제주 2024’ 대회를 개최했다. 그 대회에 초대 자격인 깍두기, ‘미디어 남성팀’의 주자로 참가한 차였다. 4명의 주자가 순번을 정해 어깨띠를 전달하며 총 41km를 도는 일종의 역전 경주. 아무도 나에게 완주 이상의 기록을 바라지 않았지만, 뛰기 시작한 이상 기록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키 러닝 클럽(나이키에서 배포한 페이스 트래킹 앱)에선 5km를 넘어서는 시점에 1km당 평균 페이스가 5분 40초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57세 맬컴 글래드웰이 1마일을 달릴 동안 나는 1km도 달리지 못한 셈이다. 발목을 다치기 전 불과 올해 5월까지만 해도 10km를 5분 초반의 페이스로 달렸는데, ‘내가 이 정도 쓰레기 몸은 아닌데’라며 왈칵 설움이 복받쳤다.
누군가는 ‘우리는 이기기 위해 달리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그건 다 거짓말이다. 겨우 4.7km 거리에 있던 반환점을 돌 때까지 건너편에서 돌아 나를 지나치며 ‘파이팅’이라 외치고 지나갔던 러너는 11명이었다. 그 숫자를 기억하는 건 그 ‘파이팅’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아주 조금씩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쌓여갔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건너편에서 ‘힘내세요’라고 외쳐주는 응원을 듣기 싫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물론 사회성을 발휘해 ‘파이팅’을 돌려주긴 했지만) 내 인성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며 달렸다. 최악의 육체에 인성까지 문제가 있어선 안 되지 않을까? 추석도 입추도 지난 그날 제주의 낮 최고 기온이 28℃까지 올라 나뿐 아니라 모두가 힘들어했다는 점만이 작은 위안이었다.
얇은 방파제 하나를 두고 홋카이도 동쪽 태평양 연안에 붙어 있는 사로마 호수 울트라마라톤 대회의 75km 지점에서 뭔가가 무라카미 씨의 신체를 빠져나갔다. 무라카미 씨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그 경계를 넘어서자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라는 의식마저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피로에 지쳐 있는 것이 항상이 되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근육이 피로에 지친 모습을 역사적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수용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상태가 되자 몸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첫 울트라마라톤에서 세컨드 윈드나 항정 상태 혹은 러너스 하이 따위의 언어적 구분의 단계를 넘어 자신의 육체가 소리치는 항거의 목소리를 무자비하게 억압하는 ‘피로 독재’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믿을 수 없겠지만, 9.4km의 짧은 거리 안에서 나 역시 이 피로 독재의 단계에 이르렀다. 반환점을 돈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으니 아마도 6km 정도를 달렸을 때였을 것이다. 맞은편에서 남성 팀보다 2분 늦게 출발한 여성 팀의 선두 주자가 나를 마주쳐 지나가며 파이팅을 외쳤다. 나는 두 번째 주자였고, 우리 팀의 첫 번째 주자는 35개 남성 팀 중 18위로 내게 어깨띠를 건넸다. 그녀와 나 사이에 얼마나 많은 남성 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18위로 달리기 시작해 2분이나 늦게 출발한 여성 팀에게 추월을 당할 수야 없지 않은가. 물론 우리 4명의 총 기록은 여성 1위 팀보다 훨씬 느릴 것이다. 그 말은 4명의 주자 중 누군가는 추월당해야 한다. 그러나 그게 내가 되긴 싫었다. 7km쯤 되었을 때 큰 커브에서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여자 선두 주자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한 명의 남성 주자가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외쳤다. “추월 안 해요. 같이 갑시다.” 그도 꽤나 지쳐 보였지만 나보다는 나아 보였다. 아마도 나를 제주의 거친 바닷바람을 막아줄 바람막이로 쓰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뒤에 있는 남자도 그 뒤에 있는 여자도 나약한 나를 노리는 맹수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의 의식은 육체를 독재하기 시작했다. 미친 듯한 속도-라고는 하지만 아마도 청계천에서 조금 빠르게 달리는 50대 초반 외국인 아저씨 정도의 속도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달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의식마저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결론만 얘기하면 나는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추월당하지 않은 채 9.4km를 완주했다. 최종 페이스는 킬로미터당 5분 21초. 기록을 보면 역시나 마지막 2km가 가장 빨랐다. 발목 부상 이후의 최고 기록이었고, 명백한 오버 페이스였다.
결승선에 돌아온 나는 완주만으로 동료 기자들의 큰 격려를 받으며 ‘이기려고 달린 건 아니니까요’라고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지만 완벽한 거짓말은 아니다. 나는 이기려고 달리진 않았지만 지는 게 너무 싫어서 달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째서인지 마지막에 나를 쫓아오던 두 명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았다. 지기 싫어하는 사람과 이기고 싶어 하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네 번을 이겼어도 한 번 진 경기를 기억하고, 후자는 네 번을 졌어도 한 번 이긴 경기를 기억한다. 즉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쩌면 더 크게 승리를 열망하는 사람이다. 대회가 끝난 뒤 두 주가 지났고, 나는 오늘도 10km를 뛰었다. 그날의 치욕을 생각하며 이번 주에 52km를 달렸다. 무라카미 씨의 역작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는 이기기 위해 달린다’ 따위의 문장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다른 주자들에게 추월당했던 기억을 꽤나 꼼꼼하게 기록했다. 우리는 트랙 위에서 추월당하지 않고 살 수 없다. 킵초게마저도 매번 앞에서만 달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추월을 기억하며 달린다. 다음번에는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달리기에 대해, 일에 대해, 또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말하기 싫어하는 엉큼한 속내인지도 모른다.

박세회는 〈에스콰이어 코리아〉의 피처 디렉터이자 소설가다.

Copyright ⓒ 에스콰이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