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동경 사랑한 창고지기…유리천장에 맞선 박물관 '대모'

토우·동경 사랑한 창고지기…유리천장에 맞선 박물관 '대모'

연합뉴스 2024-11-08 15:30:2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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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파는 여자'로 불렸던 국내 첫 여성 학예사, 이난영 前 관장

'즐문토기' 명칭 '빗살무늬토기'로 바꿔…문화유산 보호에 목소리 내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2006년 박물관 회고록을 냈을 당시 공개된 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편안하게 그리고 좀 더 재미있게, 때로는 샛길로 빠지기도 하면서 박물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지난해 초 '오랜 숙제'를 마쳤다.

구순을 바라보던 그가 병원을 드나들면서도 놓지 않았던 일이었다. 박물관을 좋아하는 할머니로서 '속닥속닥' 이야기하고픈 마음에 건강이 허락할 때마다 원고를 이어갔다.

박물관장이라는 직함을 떼고 그저 박물관을 사랑하는 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바람이었다. '박물관 할머니'가 들려주는 마지막 이야기는 '박물관에서 속닥속닥'(진인진) 책이 됐다.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이영훈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곽동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이영훈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곽동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8일 별세한 이 전 관장은 박물관 안팎에서 '한국박물관의 대모'(大母)로 불려 왔다.

그는 진주여고와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1957년 국립박물관에 첫발을 들였다. 박물관은 물론, 문화계를 통틀어도 여성이 많지 않던 시절이다.

그러다 보니 고인은 어디에서든 주목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각종 유적 조사와 발굴을 도맡아 하던 시절 그는 남자 학예사들과 함께 현장을 누볐고 '무덤 파는' 여자라는 호칭이 붙기도 했다.

이난영 전 관장이 쓴 책 이난영 전 관장이 쓴 책

[대원사·진인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고인의 박물관 생활은 유물 관리 업무를 맡게 되면서 빛을 발했다.

김재원(1909∼1990) 초대 국립박물관장의 권유로 유적 대신 박물관 '창고'를 맡게 된 그는 일본 릿쿄대학과 미국 하와이대에서 공부한 뒤 유물 관리와 박물관학의 기틀을 정립했다.

1966년 한일 협정에 따른 약탈 문화재 반환 협약에 근거해 국립박물관에 돌아온 유물을 정리하고 등록해 수장품으로 관리하는 데도 그의 역할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학계에서 '즐문토기'로 부르던 토기 명칭을 '빗살무늬토기'로 바꿔 부르게 한 것도 그다.

국립경주박물관 전경 국립경주박물관 전경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반세기 가까운 박물관 생활에서 고인이 가장 애착을 가진 곳은 경주였다.

1986년 국내 첫 여성 국립박물관장이 된 그는 신라 토우와 동경(銅鏡·구리로 만든 거울) 등을 연구하면서 신라인의 삶과 역사를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

퇴임한 뒤에는 국내외 연구 자료 3천600여 권을 경주박물관에 기증해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평생을 박물관인(人)으로 살았던 그였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2006년 펴낸 회고록 '박물관 창고지기'(통천문화사)에서 여성으로서 감수해야 했던 각종 차별대우, 국립경주박물관장 임명 당시 느낀 소회 등을 털어놓았다.

박물관 직원들과 함께 한 팔순 축하 행사 모습 박물관 직원들과 함께 한 팔순 축하 행사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런 상황에서도 고인은 박물관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1993년 뚜렷한 계획을 마련하지 않은 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려는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고 국보인 성덕대왕신종 보호를 위해 타종 행사를 중단하기도 했다.

함순섭 국립경주박물관장은 고인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박물관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공식 행사장에는 오시지 않았지만, (행사 이후) 조용히 찾아와 격려하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원칙에 충실하고 여성으로서 유리천장을 깬" 선배라며 고인을 기렸다.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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