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열렸던 페미니즘 문화제였다. 천 생리대 제작, 가부장제에 십자가를 꽂는 퍼포먼스 등 여학우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펼쳐냈다. 당시만 해도 용기 있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의미한 장을 만드는 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알았는데, 왜인지 다음 해부턴 열리지 않더라. 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나에겐 인생의 바탕이 돼준 것 같다.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이 정도의 생각은 하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를 깨우치게 해준 선배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도 갖게 됐다. 그래서 ‘마녀들의 카니발’이라는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하면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성들의 이런 움직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누군가에겐 우리가 마녀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텐데, 그 점을 중의적으로 꼬집고 싶었다.
30년 전 여성 인권을 위해 맞서 싸웠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영화는 여성 노동자의 권익 신장부터 생리휴가, 가정 폭력을 일삼은 남편을 살해한 여성의 무죄 석방 등 뜨거웠던 부산 여성운동사를 되짚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부산의 여성운동은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에서 처음 시작됐다고 한다. 올해로 부산 3·8 여성 대회가 34회를 맞았는데, 부산에서 30년 이상 3·8 여성 대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2019년 기획 당시 알게 됐다. 그걸 보고 문득 ‘나 역시 부산에서 나고 자란 여성인데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을까? 정작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터에서 일어나는 여성들의 역사에 대해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영화를 기획했던 당시는 개인적으로 출산과 육아, 그리고 나의 커리어 사이에서 도무지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시기였다. 예전에 선배님들은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내고 사셨을까 하는 마음에 그분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라는 좋은 명분이 생긴 셈이니 내겐 너무나 감사한 기회였다.
단순히 과거 여성운동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요즘 세대의 페미니스트들과 선배 활동가의 이야기를 두루 담은 것이 좋았다. 그들과의 만남은 어땠나?
10대 친구부터 60대 선생님들까지 50명 넘게 만난 것 같다. 인터뷰하는 일이 익숙지 않아 질문부터 치밀하게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막상 윗세대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땐 그분들이 해주시는 이야기에 질문을 덧붙이는 게 훨씬 도움이 됐다. 반대로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만날 땐 어느 정도 질문을 정해 대화를 이끄는 것이 필요했다. 10대 친구들은 내가 겪었던 시대와 억압의 형태가 분명 다를 것이기 때문에 인터뷰 역시 조심스럽게 다가갔는데, 자신의 이야기나 서사를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후에 완성된 영화를 들고 1세대 선배님들을 찾아가 함께 영화를 봤는데, 10대 친구들의 이야기를 보시고 굉장히 마음 아파하셨던 게 기억난다.
과거 부산의 여성들이 한계에 맞서 변화를 이뤄냈지만, 동시대 여성들은 여전히 혐오와 억압을 마주하고 있다. 딥페이크와 같이 이전엔 없던 형태의 문제에 직면해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한편으론 절망감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영화를 만들며 외로움을 느낀 순간은 없었나?
얼마 전 인터뷰에 응해준 분들에게 영화 개봉 소식을 알리고자 연락을 드렸는데 한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요즘 딥페이크 문제로 피해를 본 친구들이 주변에 있는데, 그 친구들에게 이 영화가 힘이 돼주었으면 좋겠다고. 지금의 여성들은 존재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 시점에 우리 영화가 나왔다는 게 감회가 복잡하기도 했고 기자님처럼 절망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상기할 수 있는 점은 주변에, 내 옆에 나와 함께 걸어갈 여자들이 있다는 거다. 동네 언니들, 직장에 가면 나와 함께 고군분투하는 여성 동료들. 이들과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힘이 날 것이다. 여성운동을 과거엔 담론 중심으로 바라봤다면, 지금은 내 옆에 있는 언니, 동생과 여성주의 책 한 권 시원하게 읽어내는 것, 우리 동네 도서관에 읽고 싶은 책을 신청할 때 페미니즘 책 주문을 꾸준히 넣어 서가를 채워보는 것도 유의미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나만 아는 행동에 그칠지언정 나로 인해 누군가가 그 책을 읽게 될 수 있고, 그것이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는 법이니까. 이 영화 역시 여성들에게 작은 동력이 됐으면 좋겠다.
이제 미디어는 여성을 주요한 화자이자 주제로 삼는다. 다양한 면모를 지닌 여성이 주인공이 되고 여성 서사가 주요한 갈래가 되는가 하면, 〈마녀들의 카니발〉처럼 외면받았던 과거 여성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기도 한다. 창작자로서 이러한 변화를 체감하나?
창작자로서, 그리고 시청자로서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너무 즐겁다. 하지만 한편으론 지금보다 더 다양한 모습을 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 아주 마르고 어린 여성들이 과거 미디어를 가득 채웠다면 이제 그보다 다양한 모습의 여성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다양한 몸과 이야기를 가진 이들의 모험을 보여주는 것이 미디어의 역할이라고 본다. 가령 〈마녀들의 카니발〉에서 여성 장애인 연대분들의 역사를 조명한 것처럼 여성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폭넓게 주목받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미디어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나?
결국 공공 미디어와 방송이 중요하다고 본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태도를 가지고 소수의 이야기를 콘텐츠로 담는 것, 그것이 공공 방송이 해야 하는 분명한 몫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앞으로 다루고 싶은 여성의 이야기 또한 같은 결을 지니고 있겠다.
그렇다.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역사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뿌리내리고 사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부산처럼 항만을 끼고 있는 곳은 성매매 집결지가 늘 있어왔는데, 목포처럼 항구가 있는 지역에선 어떤 여성들이 어떤 특수성을 지닌 서사를 가지고 살아왔는지 등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ENTERTAINMENT / SHIN JAE HO & KANG SUK KYUNG
「
신재호 PD & 강숙경 작가
」
〈강철부대W〉 첫 방송부터 시청률, 화제성 모두 난리다. 성공적인 출발을 한 소감은?
강숙경(이하 ‘숙경’) 무조건 시청률이 잘 나올 거라는 자신감보다는 우리만 잘 만들면 시청자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었다.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같아 기분 좋다.
신재호(이하 ‘재호’) 나의 경우엔 아무래도 여성 시청자와 접점이 많지 않아서 반응을 늦게 체감한 편이다. 여성 시청자분들께 특히 인기가 많다고 들었는데, 그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감사한 마음이다.
특히 고무적이라 생각하는 반응도 있었나?
재호 여군이라고 해서 이전 시즌보다 약할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하고 멋있다는 반응이 있었다. 선입견을 가진 분들에게 〈강철부대W〉 24명의 대원분은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숙경 이번 시즌을 준비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부분도 그런 점이었다. ‘여성’이라는 것에 어떤 한계도, 기준도 두지 않고 이들을 군인 그 자체로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호 맞다. 남군이냐, 여군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강인하고 멋진 군인이라는 걸 보여주는 데 지향점을 뒀다.
이번 시즌은 707, 특전사, 해병대, 육군, 해군, 특임대 총 6개 부대 24인의 대원이 출연한다. 부대나 대원을 선정함에 있어 특정한 기준이 있을까?
재호 이전 시즌과 다르게 특수부대부터 일반 부대까지 포함했다. 여성들로 구성된 특수부대는 전무할뿐더러 특수부대에서 복무하는 여군 역시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부대 편제에 있어서는 폭을 넓히는 것이 필수였다. 여군을 섭외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전역하신 분들이 많지 않아서 섭외가 가능한 대원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실제로 독거미 부대에서 조성원 대원만 출연이 가능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출연진도 화제 만발이다. 특임대 조성원, 우리나라 최초 여성 저격수 박보람 중사 등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어땠나?
재호 마치 지금껏 만나본 적 없는 존재를 마주한 느낌이었다.(웃음) 사전 인터뷰 당시 부대에서 복무할 때 입었던 전투복을 챙겨 와달라고 요청했는데, 대부분의 출연진이 군복을 입고 왔다. 사실 지금은 군인이 아닌 일반인인데 처음 자리에 앉을 때부터 “여기에 앉으면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더라. 군인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인간으로서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숙경 한 출연자가 사전 인터뷰 때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군에 있을 때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제대하게 된 분이었다. 본인은 이 일을 너무 사랑하고 부대에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다친 몸이 돼버린 자신이 부대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마음에 전역을 결심했다는 말에서 나로선 차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애국심을 느꼈다.
〈강철부대W〉를 비롯해 〈사이렌: 불의 섬〉 〈무쇠소녀단〉 등 여성이 신체적인 한계에 도전하고 운동하는 모습을 그린 예능 프로그램이 부쩍 많아졌다. 여타 프로그램과는 다른 〈강철부대W〉의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재호 〈강철부대W〉 역시 피지컬적인 능력을 검증하는 미션도 나오겠지만, 군인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면모 또한 많을 거다. 군인으로서 전략과 전술을 짜는 모습이라든지, 계급이 중요한 군인의 특성상 팀장의 리더십과 팀원들의 팔로어십 등과 같은 모습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그게 우리만의 차별점이자 강점이 아닐까?
숙경 〈강철부대W〉의 출연진은 뒷담화를 하지 않는다. 그만큼 본인의 능력과 소속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일 거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특성상 상대방이 세 보이면 본인을 더 드러내려고 하기 마련인데, 이들은 서로 잘하는 점에 대해 인정도 빠르다. 출연진에게 감동했던 포인트도 있는데, 데스매치 후에 탈락자 인터뷰를 할 때 그런 말을 하더라. 우리의 탈락이 부대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될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렵다고. 군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은 어떤 프로에서도 볼 수 없는 포인트라 생각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는 여성들의 비중이 늘어난 것처럼 이제 미디어는 여성을 주요한 화자이자 주제로 삼는다. 미디어가 여성을 다루는 방법과 형태가 변화하고 있음을 필드에서 어떻게 체감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숙경 과거 영화나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은 늘 연약한 존재였는데, 이젠 여성 히어로물도 눈에 띄게 늘었다. 이런 새로운 캐릭터들이 시청자의 환영을 받는 건 그동안 여성 캐릭터의 모습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능도 마찬가지다. 그간 예능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들의 캐릭터가 부각되고 있는 흐름 역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남성 캐릭터만큼이나 여성 역시 다양성을 존중받아야 할 테니까.
재호 최근 여성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굉장히 많아졌는데, 그 안에서 여성들이 뿜어내는 폭발적인 에너지,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모습에 대중 역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라 생각한다.
숙경 그게 곧 미디어의 역할이지 않을까? 공감하려면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나. 여성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면 참가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경쟁하는지, 무엇을 쟁취하고자 하는지 솔직하게 드러난다. 〈강철부대W〉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내가 이길 줄 알고 저 팀을 선택했는데 져서 너무 자존심 상하고 부끄럽다고, 가장 민낯의 솔직한 표현으로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낸다. 얼마나 멋있나.
최근의 여성 예능들은 기존 사회가 부여한 성별에 따른 관념, 성역할에서 탈피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강철부대W〉가 동시대에 전하고자 하는 영향력은 어떤 것인가?
재호 〈강철부대W〉는 여성 서사로 묶이는 프로그램이지만, 그 틀을 벗어나기도 하는 역설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여군이라는 존재를 담고 있지만,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여군보다 군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강인하고,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어 노력하는 존재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 이들을 담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인생의 귀중한 경험을 했다.
숙경 〈강철부대W〉의 출연진은 내가 군대에서 배운 것, 우리 부대의 명예를 보여주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아름답고 순수한 마음을 따라 대한민국의 여군이 이렇게나 강하고 멋지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어디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24인의 빛나는 목표를 꼭 발견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