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테’가 돌아온다

‘딕테’가 돌아온다

바자 2024-11-07 13:55:30 신고

3줄요약
사진/ 연합뉴스 제공
사진/ 연합뉴스 제공
테레사 학경 차(이하 차)의 책 『딕테』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지 몇 해 째다. 알라딘이나 예스24 등 중고 서점에 접속해 검색하고, 일부 온라인 서점에 ‘재입고 신청 알림’을 설정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중고 서적 원본의 약 30배 넘는 가격(약 30만원 대)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한다고? 0 하나가 잘못 붙은 건 아닐까? 영영 내 책장에 꽂힐 일은 없겠구나’ 반쯤 포기하던 중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문학사상 출판사가 북펀드로 『딕테』를 재출간한다는 거였다. 그동안 차의 작품을 관리하는 버클리 대학교가 『딕테』의 영문판 출간만을 허가했기에 재출간은 사실상 소원했다는 것이 출판사의 설명이다. 문학사상사와 유족 대표인 차학성 선생과의 인연 덕분에 번역본을 다시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고. 1년여 간의 작업을 거쳐 나오는 개정판의 북펀딩은 오는 11월 17일 마감된다. 이미 2,084권(11월 6일 기준)이 예약되었고 목표 금액을 훌쩍 뛰어넘었다. 문학사상사 황인석 담당 편집자는 “기대한 것보다 반응이 뜨거워서 매우 놀랐다. 아마 캐시 박 홍 작가의 〈마이너 필링스〉의 영향 때문인 것도 같다. 열린 텍스트를 열린 마음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분명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라고 소회를 전했다.
알라딘 북 펀드 링크


차학경이라는 세계
사진/ 문학사상 알라딘 제공
사진/ 문학사상 알라딘 제공
많은 사람들이 유작 『딕테』를 기다려 왔다니. 누군가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일 수 있지만, 2020년 이후부터 예술계와 문학계에서 우리는 그의 이름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지난 2020년, 뉴욕타임스가 차의 사후 40년 만에 ‘늦은 부고(Overlooked)’ 연재 시리즈에서 차를 조명한 기사(링크)가 시작이었을 것이다. 뒤이어 2022년 한국계 미국 작가 캐시 박 홍의 에세이집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에 등장하면서 국내에서도 차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같은 해 휘트니 비엔날레에서는 차의 예술 작품을 재전시하며 『딕테』 전문을 읽는 마라톤 리딩 행사를 열기도 했다.

사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미술관 제공
사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미술관 제공
〈딕테〉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학경이 어떤 인물인가를 먼저 짚고 나가야 할 것이다. 문학, 영화, 사진, 설치 작업, 연기, 행위예술…. 그를 단 하나의 장르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8년 남짓 활동하며 남기고 간 50여점의 작품만이 그를 설명할 뿐이다. 차는 1951년에 부산에서 태어나 11세에 미국으로 이주한다. 차와 차의 가족이 살아온 삶은 초기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전형인 셈이다. UC 버클리 대학교에서 비교문학과 미술을 전공하고, 파리에서는 구조주의 언어학과 프랑스 영화 이론을 공부한 그는 1980년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중 사진작가 리처드 반스(Richard Barnes)와 결혼한다. 1982년에는 『딕테』의 가제본을 완성해 부모님에게 보낸다. 같은 해 11월 5일,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일을 마친 후 퍽 빌딩 Puck Building으로 남편을 만나러 간 현장에서 경비원 조세프 산자(Joseph Sanza)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살인범은 9건의 성폭행으로 지명 수배된 연쇄 강간범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1세였다. 『딕테』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출간됐다. 예술 작품들 중 유일하게 ‘책’의 형태로 남은 작품이다.

사진/ BAMPFA 제공
사진/ BAMPFA 제공
사후 40년이 지난 지금, 그가 재조명을 받는 이유는 단연 그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작품 세계에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여성주의 담론이 두각을 드러내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작품으로 승화하는 시대 정신에 부합한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예술과 문학계가 이주민과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부터 대학 교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차는 제3세계 여성의 분열된 정체성과 자기 욕망을 다양한 예술의 방식으로 표현해낸 작가다. 이민자이자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좌절과 고뇌, 방황과 혼란을 꺼내는 방식으로 서구 중심과 남성 중심적 사고를 비판한다. 개념 미술,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의 경계를 지우고 넘나들며 실험을 통해 기존 가치관을 해체하며 새로운 의미와 관계를 창조한다. 대표작인 1975년 퍼포먼스 "Aveugle Voix"(맹인의 목소리)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제3세계 여성이 겪은 소외라는 자기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억압되어 온 다양한 목소리와 경험들로 논의를 확장해 나간다는 데에서 실천적인 성격마저 지닌다.

쉴 새 없는 변주와 파격의 책
‘받아쓰기’라는 뜻의 제목의 책 『딕테』는 작가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서전 혹은 콜렉션 도록과도 같다. 여러 언어와 문화의 혼재로 매우 모호하고 난해하다는 점이 차가 살다 간 짧지만 강렬한 삶과 무척 닮아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텍스트를, 그를 더욱 이해하고 싶어한다. 각 장의 제목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홉 뮤즈와 그들의 고유 예술 영역을 차용하여 명명한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Mnemosyne)가 아흐레 동안 제우스(Zeus)와 동침하여 아홉 명의 뮤즈 신을 낳듯, 책의 구성은 가톨릭 의식인 ‘9일간의 기도(novena)’로 이루어져 있다. 차는 기도 의식을 관장하는 인물이자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여주인공 화자 ‘말하는 여자’를 소개한다. 유관순과 잔 다르크, 만주 태생인 차학경의 어머니 허형순 여사와 성 테레사가 있다. 언어와 문화의 경계에 선 여성들이자 주체적 인물이다. 이들 목소리를 빌려 자신이 경험한,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책의 매력은 그가 실험한 다양한 형식에 있다. 텍스트는 플롯이 뚜렷한 소설도 아니며, 일기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서간문이나 서정시, 르포 장르의 형식을 마구 넘나든다. 불어, 영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한자, 한국어 등 여섯 가지 언어가 번역 없이 해체되고 조합되며 교차한다. 독자는 언어를 잃어버리며 사고가 잠시 멈추는 낯선 경험을 한다. 이민자들이 필연적으로 고통스럽게 부딪히는 ‘언어와 소통 문제’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와 배치한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동양 침술에 쓰이는 경혈도, 음성학 교재에서 마주칠 듯한 발성기관 표, 모아이 조각상과 서예 이미지를 텍스트에 덧대며 변주하면서 주석도 설명도 달지 않는다. 독자들로 하여금 작업을 명료하게 이해하거나 장악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며, 탈장르적 텍스트의 새로운 읽기 경험을 선사한다. 해독불가함이 주는 신선함과 짜릿함은 덤이다.

“웅얼거린다. 웅얼웅얼한다. 속에는 말하기의 고통 말하려는 고통이 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더 거대한 것은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이다. 말하지 않으려는 것. 말하려는 고통에 대항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안쪽에서 곪는다. 상처, 액체, 먼지. 터뜨려야 한다. 비워내야 한다.”

난민과 이민자의 정체성, 여성주의,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찰 등 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차학경의 웅얼거림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로 재해석되고 새롭게 발화할 것이다.

차학경을 더 알고 싶다면!
영화 딕테-차학경 오마주. 감독: 미영, 2012, 33min 차학경의 작품 세계를 파고들며 실험적 방식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오마주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2012 여성 영화제 출품작
『안녕, 테레사』, 저자: 차학성, 2016 경찰이 찾지 못한 누이동생의 시신을 주변 건물을 모조리 뒤진 끝에 찾아낸 차학경의 오빠 존 차(John Cha)가 쓴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법정 소설
전시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차의 작품 일부를 만날 수 있다. 내년 3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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