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최고 무신의 아들(박정민)과 그의 몸종(강동원)이 신분의 차이를 넘어 깊은 우정을 쌓으며 성장했지만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왕의 무사와 의병으로 다시 만나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는 설정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축이다. 흥미롭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몇몇 포인트가 있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된 임진왜란은 양반과 노비, 관군과 의병, 승려와 사대부가 혼연일체가 돼 국란을 극복하고 국가의 존립을 지켜낸 처절하면서도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려진 임금은 지나치게 무능하고 지나치게 탐욕스럽고 지나치게 공감 능력이 결여돼 있다. 대부분의 양반 계층 또한 그렇다. 반면 민중은 선하고 도덕적이며 정의로움 그 자체로 묘사된다. 중간은 없고 계급과 계층에 따른 선악이 무 자르듯 나뉘어 서사가 진행된다. 극적 표현의 정석이라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대중문화에 이 정도 각색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꾸짖을 사람도 있겠지만 문제는 비단 이 영화 한 편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한국 영화계 전반, 나아가 드라마·문학을 망라한 문화예술계 전반에 만연한 이분법적 계급주의의 흐름 속에 ‘전,란’이라는 영화가 하나의 점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상 수상이라는 전인미답의 고지에 오른 영화 ‘기생충’, 무려 1300만 명이 본 영화 ‘베테랑’에서 그려진 부자와 기업인은 몰상식하고 공감 능력이 결여돼 있고 비도덕적이기까지 하다. 10·26을 소재로 한 ‘남산의 부장들’에서 대통령과 통치세력은 국민의 안위나 나라의 발전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권력 그 자체만 좇는 탐욕스러운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도식화된 이분법이 만연한 대중문화계가 만들어낸 콘텐츠들은 은연중에 사회의 통일성을 흔들고 대다수 소비자들에게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유하는 큰 공통점보다 그런 차이에 집중하게 만든다. 건강한 사회 가치와 인식은 이렇게 형성되는 것일까.
창작물에서 그려지는 사회 지도층의 과장된 위선과 탐욕을 클로즈업하고 민중의 모든 위법과 무질서를 정의로운 저항으로 분칠하는 관행과 흐름을 직시해야 한다. 사회의 통합과 갈등 치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되레 법을 어기고 사회 질서를 흔드는 것을 영웅시하기까지 하는 일련의 경향성이 문화예술계 내에 분명히 존재한다. 부와 권력을 가진 것 자체가 악일 수 없고 가난하고 힘없다는 사실이 선함을 담보하지 않는다. 아이러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우리 문학계, 나아가 온 나라와 국민의 쾌거이고 경사다. 멋진 일이다. 대한민국 만만세다. ‘우리 이 정도다’ 자부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미묘하고 첨예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그의 시선이 아쉽다는 지적도 공존한다. 정상적이다. 획일적 쏠림보다는 사회가 건강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5.18과 4.3이라는 극도로 복잡하고 미묘한 사건을 국가의 폭력과 민중의 저항이라는 두 가지 잣대로 가두어 놓고 등장인물들에게 과도한 피해자성을 부여한다. 민중의 저항만을 부각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안 불의의 피해자가 된 군인과 경찰, 공무원의 희생은 없는 일처럼 밀려나고 만다. 그들 또한 역사와 시대 그리고 사회의 소용돌이에 희생자일 수 있음을 간과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한강의 소설에 내재된 비틀기는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오늘의 시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에게 고정된 관점을 강요하고 온 국민이 과거의 상처를 붙들고 과거에 붙들려 있도록 이끈다. 아픔이다.
흔히 한민족을 한(恨)의 민족이라 한다. 가난과 억압, 끝없는 외침과 수탈로 얼룩진 반만년 역사가 심어 놓은 민족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불과 50년 만에 그 모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유사 이래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나라를 가꾸었다. 이제는 전근대의 아픔에서 비롯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당당하게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우린 경제적 성취는 물론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워낸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우린 더 큰 내일도 꿈꿀 수 있다. 미국 영화에는 꼭 중요한 순간에 성조기와 독수리가 빈번히 등장함을 보게 된다. 그 장면이 꼭 필요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유난스러워 보이는 이 작은 상징은 미국이 강조하는 통합과 ‘그레이트 아메리카’(Great America) 자부심의 발로로 보이기도 한다. 미국이 그토록 강조해 마지않는 아메리카 퍼스트는 미국의 중심부에서 작은 도시까지 샅샅이 스며들어 국민의 애국심과 자부심을 자극하는 중요한 문화적 콘텐츠로 자리잡고 있다. 결국 애국심을 문화적 우월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도 태극기와 무궁화가 곳곳에 등장하는 미시적 ‘국뽕’(자국 찬양) 퍼레이드는 안 될까.
세계에 할 말 하는 나라, 우리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나라. 이제 국뽕이라도 할 때 아닌가. 잃어버린 통합적 가치도 지향점 아닌가. 그 길로 나아가려면 먼저 영화가, 소설이, 드라마가 성장과 회복, 진취와 통합을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대중문화 창작자들이 피해자 마인드를 벗어던지고 승리한 자의 시선으로 역사를 발전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때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민족의 역사적 전통에 걸맞은 문화 선진국에 오르는 길이고 K-문화의 자부심이 완성되는 길이다. 우리도 한번 시작해 보자, ‘그레이트 코리아!’(Great Korea!)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