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는 누구나 등록 사무소에 방문해 신고하여 성별 및 이름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한 자기결정법이 11월부터 본격 시행된다. 부유하는 정체성과 차별과 혐오에 맞서 살아가는 소수자들에게 목소리와 힘이 실리게 되었다. 과연 법은 삶의 경계를 허물고, 젠더에 대한 사고의 확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도가 될 수 있을까.
성별 등록 자기결정법의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선 성전환법(Transsexuellengesetz)이 제정된 19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과거 이 법은 보고서 절차가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건 물론, 의사의 진단서와 법원 명령이 필수적으로 필요해 비용이 많이 들었다. 독일 정부는 기존에 시행한 성전환법이 성소수자 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을 받아들이고 법을 개정했다. 성소수자에게 심리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부담을 가중시켰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독일 연방 의회는 올해 4월 12일 만 14세 이상 성인 누구나 등록 사무소에 방문해 신고하여 성별 및 이름을 변경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자기결정법 초안을 통과시켰다. 찬성 374명, 반대 251명이 표를 던졌다.
포용과 자유를 향해 나아가기
법안 발효일인 11월의 첫날이 되자 독일에선 공식적으로 만 14세 이상 성인이 남성·여성·다양·무기재 중 하나를 선택해 신고만 하면 자신의 성별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여자라고 인식하면 여자, 다양성이라면 다양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선언할 수 있게 된 것. 등록 사무소에 신고서를 제출하는 절차만으로 성별 및 이름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정신과 의사 2인의 심리 감정과 법원의 허가(결정문)는 더는 필요치 않다. 성별은 ‘남성(männlich)’, ‘여성(weiblich)’, ‘다양(divers)’ 중에 선택할 수 있는데,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자신의 성별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인 ‘무기재’가 옵션에 있다는 사실. 누군가의 성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상대방에게 먼저 어떤 표현을 쓰면 좋을지 물어보거나, 원치 않는 성별 공개를 금지하며 성을 밝히기 싫다는 의견까지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또한 법안은 ‘트랜스젠더’를 태어날 때 지정된 성별을 인식하지 않거나, 단순 인식만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는데 덧붙여 ‘의학적 기준에 따라 남성 또는 여성으로 명확하게 분류될 수 없는 타고난 신체적 특성을 갖는 간성(Inter-sex),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고 정의하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이하 논바이너리), 젠더 이분법에 반대하며 대항하는 젠더 퀴어까지를 포함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들 모두를 보호하고 모든 차별에 반대해야 한다는 점을 내포한다. 결국 법안 시행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름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인식과 법체계가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법안 시행은 그동안 있지만 없다고 ‘여겨졌던’ 존재가 자신을 세상 밖으로 가시화하고 적극적 주체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관점에서도 변혁적이다. 많은 사람들과 사회는 모든 사람이 시스젠더(태어날 때 지정된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단정해버리지만 사실 지정 성별로 스스로를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많다. 이같은 움직임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논 바이너리 정체성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선언하는 연예인, 운동선수도 점점 늘어나자 커밍아웃이 더는 어색하지 않다. 이미 2020년 샘 스미스는 자밀라 자밀이 선보인 인스타그램 쇼 〈I Weigh〉에 출연해 성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 고백하며 ‘them/they’로 정체화했다. 우타다 히카루 역시 정의할 수 없는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용기 있게 꺼냈다. 올해는 유로비전 2024는 대회 최초로 커밍아웃한 논바이너리 가수 니모(Nemo)가 우승을 거머쥐었다. 니모의 노래 '더 코드(The Code)'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수용하는 정을 다루기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 받는다. 그는 무대에 논 바이너리를 상징하는 자긍심의 깃발을 들고 오르기도 했다. 지난 2024 파리 올림픽에서도 '논 바이너리 트랜스젠더'들이 출전했다. 미국 육상 대표팀의 니키 힐츠, 캐나다 여자축구대표팀 미드필더 퀸도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논 바이너리로 정체화했다.
자신의 존재를 밖으로 꺼내기
독일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에 따르면 접수된 신청 건은 8월 한 달에만 1만 5천 건. (독일 정부는 시행 3개월 전인 8월부터 신청을 받았다.) 실제 많은 독일 국민이 변경을 희망하고 있으나, 독일 내에서도 찬성 의견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은 아니다. 부작용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성범죄에 악용될 가능성, 스포츠 경기에서 선수 성별에 따른 페널티 등 논란이 잦아질 거라는 우려도 나온다. 일부 여성 인권 단체는 탈의실, 화장실 등 성별이 나뉜 장소에서의 혼란, 여성 전용 공간에 접근할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려와 반대 의견을 의식해 법안은 사우나, 수영장 등 시설에 입장 기준을 자체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부여하며 변경을 신청해도 성별 변경이 바로 이뤄지지는 않는 장치를 마련해둔 모습이다. 등기소에 통보한 시점에서 1년 후 실효성을 가지게 된다. 마음이 바뀌거나 급히 결정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충분한 숙려 기간을 둔 것이다. 성별 재변경 차단 기간도 1년을 둔다.
물론 젠더 퀴어나 사회적 성, 자기 성정체성에 보수적인 일부 사람들에게는 독일의 결정이 지나치다고 느껴지거나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최초가 아니며 파격적 결정도 전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인권 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에 따르면 벨기에, 덴마크,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몰타, 포르투갈도 자기 선언을 기반한 간단한 성별 결정권을 보호하는 나라들 중 하나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중 아르헨티나는 남성중심문화로 악명 높으면서도 의외로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일에 급진적이고 적극적이다. 이미 2012년 ‘성별 정체성 법안 la Ley n° 26.743 de Identidad de Género’이 반대표 없이 제정되었다. 성이 그(he/him), 그녀(she/her) 단 둘이라고 생각해온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이와 같은 자기 결정 법안 제정은 먼 일처럼 느껴진다. 허나 존재하는 이들을 다르다는 이유로 없다고 할 수 없으며,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 의사와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거나 혐오와 차별을 견뎌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마침 11월 20일, 전 세계적으로 혐오 범죄로 목숨을 잃은 트랜스젠더를 추모하는 '트렌스젠더 추모의 날'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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