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TV 앞에서 사적 제재를 기다리는 이유

우리가 TV 앞에서 사적 제재를 기다리는 이유

에스콰이어 2024-11-05 00:00:07 신고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대답은 ‘있다’여야만 할 것이다. 나도 글을 쓸 때는 좀 너그러운 어른처럼 보이고 싶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당신에게는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없다고? 나는 당신의 윤리를 믿지 않을 작정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복수하고 싶은 상대가 있다. 이를테면 10년 전 홍대 뒷골목을 걷다가 나와 부딪힌 뒤 아무런 사과 없이 “아이 씨발” 하고 지나간 그 새끼가 있다. 덩치가 나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가던 길을 갔다. 나는 아직도 새벽 2시쯤 잠을 자려 애쓰다 그놈과 부딪혔던 순간을 떠올린다. 옆에 있던 노래방 간판을 들어 정수리를 찍는 상상을 한다. 피가 정수리에서 베수비오 화산처럼 폭발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그렇다. 나는 소인배다.
나약한 소인배는 사적 복수를 소재로 한 영화를 좋아한다. 그렇다. 내 이야기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은 쿠엔틴 타란티노다. 그의 영화는 죄다 복수극이다. 다만 그의 복수극은 어디까지나 완벽한 장르의 세계 속에 머무른다는 점에서 관객이 윤리적 모순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 〈킬 빌〉 〈장고 : 분노의 추적자〉 같은 영화들을 생각해보시라. 타란티노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판타지다. 과장된 세계 속에서 과장된 복수를 펼치는 과장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은 어떤가. 박찬욱의 세계는 과장된 벽지 한 장만으로도 이게 현실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은 좀 다르지 않냐고? 다시 한번 보라. 캐릭터의 뒤틀림이 지나치게 심한 나머지 마지막 장면에서는 결국 박찬욱이 만든 가상 세계 속의 윤리적 판타지가 된다.
사적 복수, 혹은 사적 제재라는 소재를 가장 먼저 할리우드에서 꽃피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티 해리〉 시리즈다. 1971년 첫 〈더티 해리〉가 개봉했을 때 할리우드는 난리가 났다. 경찰이 법망을 무시하고 빠져나가는 범죄자들에게 개인적인 징벌을 내린다는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지금은 전혀 급진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 할리우드는 ‘더러운 해리’의 후배들로 넘친다. 시리즈를 거듭하며 거의 타란티노 스타일의 판타지 영화가 되어버렸지만 〈존 윅〉 첫 번째 영화는 확실히 〈더티 해리〉의 후배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따져보자면 결국 우리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2020년대 들어와서 한국 티브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사적 제재 소재의 드라마들은 어떤가.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SBS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는 판사의 몸에 들어간 악마가 구제 불능의 악인들을 법망 밖에서 물리적으로 처단하는 내용이다. 역시나 SBS 드라마였던 〈모범택시〉는 법으로 구제받지 못한 피해자들을 대신해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 역시 학교 폭력 생존자의 복수극이다. 디즈니플러스 〈비질란테〉는 아마도 가장 문제적인 드라마일 것이다. 비질란테는 자경단원이라는 의미다. 법망을 피해 나가는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경찰대학생이 주인공이다. 사적 제재를 소재로 한 한국 드라마가 줄줄이 만들어지고,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내는 이유는 뭘까. 뭐긴 뭐겠는가. 속이 시원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강한 나라 중 하나다. 어쩔 도리 없는 일이다. 시민을 학살한 독재자도 감옥이 아니라 저택에서 편안히 눈을 감는 나라다. 피해자의 신상보다도 가해자의 신상을 더 감싸는 나라다. 나 역시 흉악한 범죄자 얼굴을 모자이크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주 전형적인 한국인 중 하나다. 법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법은 객관적이다. 적어도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법이다. 범죄자를 저잣거리에 묶어놓고 돌을 던지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돌을 던지고 싶어 한다. 2020년대 들어 사람들은 그저 사법 시스템을 불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악당을 단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소셜미디어와 유튜브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남자들,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집주인들의 정보는 더는 숨겨지지 않는다. 유튜버들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숨겨지는 범죄자들의 얼굴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으로 수익을 올리는 방법을 찾아냈다. 학교 폭력? 소셜미디어 시대 이전의 학교 폭력 가해자들은 과거를 세탁하고 얼마든지 연예인이 될 수 있었다. 이제 그건 불가능한 일이 됐다. 시스템이 속 시원하게 작용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자경단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모든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은 역시 2018년의 사법 농단 사태라고 확신한다. 대법원이 오락가락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더는 법복을 입은 히어로에 만족하지 않게 됐다.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미스 함무라비〉는 더는 만족스럽지 않다. 사람들은 이제 법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 확실한 사적 제재를 가하는 소시민적 히어로를 보고 싶어 한다. 한국인에게 한국은 고담이다. 모두가 배트맨을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한국 역사상 가장 뒤틀린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법은 어쨌거나 점점 나아지고 있다. 범죄는 줄어들고 있다. 한국은 여전히 사법 시스템의 결함이 많은 나라지만, 한국 사회는 어제보다 오늘이 언제나 더 낫다. 옛날이 더 나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심각한 선택적 기억상실 증세를 겪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사적 제재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영화의 유행 앞에서 딱히 윤리적 고민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적 제재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영화들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살인자 o난감〉과 〈베테랑 2〉를 생각해보자. 두 작품은 사적 제재에 열광하는 우리의 욕망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차원으로 나아간다. 딜레마다. 우리는 사적 제재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동시에 그 카타르시스가 온당한 것인지를 스스로 묻게 된다. 당신은 유튜버 카라큘라에 열광하며 백만 클릭 수의 하나가 됐지만 카라큘라는 결국 법의 심판을 받았다. 현실에서 사적 제재는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된다.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적 제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아지는 건 당연히 우리 모두가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는 어떤 불합리의 반영이다. 우리의 사적 욕망을 투영한 창작물이 많아지는 건 비윤리적인가? 글쎄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폭력적인 게임이 사람들을 더 폭력적으로 만든다고 주장하는 학부모 단체의 고압적 윤리에 동의하는 것과 다름없다. 지난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역사를 잘 생각해보시라. 한국 장르 영화와 드라마는 원초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데 상당히 인색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배트맨 같은 존재가 없었다. 고담 시티의 악당들을 처단하면서도 어둠 속의 음험한 존재로서 남아 있는, 사적 제재의 아이콘인 동시에 조커의 거울상이나 다름없는 배트맨 같은 존재를 우리는 가져본 적이 없다. 픽션은 픽션이다. 사적 제재를 다루는 픽션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도 사적 복수와 제재에 무조건 열광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불가능한 복수를 수행하는 픽션은 우리에게 근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동시에 그것을 소비하는 우리 스스로 근원적인 윤리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게 바로 창작물이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기능 중 하나다.
사실 나도 사적 제재에 관한 시나리오를 한번 써볼까 생각 중이다. 고양이를 살해하는 인간들을 찾아내어 잔인하게 복수하는 내향적 소인배에 대한 이야기다. 잠깐. 〈존 윅〉이 바로 그런 이야기 아니었냐고? 그건 개고 이건 고양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총을 구할 수 없으므로 무기는 좀 더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무언가가 될 예정이다. 영화가 만들어져서 흥행에 성공한다면 수익금의 절반은 고양이 보호소에 기부할 생각이다. 이 글을 읽는 돈 많은 독자들의 적극적인 투자를 바란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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