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떠나야 한다. 한 해의 수심(愁心)은 비워내고, 반짝이는 풍경들로 마음을 채우기 위해. 11월을 여는 저마다의 마음가짐으로,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5인이 훌쩍 떠나고 싶은 국내 여행지를 골랐다. 마음을 넉넉하게 채울 책과 영화, 술 그리고 음악과 함께. 다섯 곳의 여행지에서 우리의 가을이 보다 찬란한 빛으로 물들길 바라며.
가만한 마음으로, 고성과 남해에서
소란함을 다스리고 가만한 상태로 나아갈 것. 이 여행의 목적은 오직 그뿐이다. 여름 내내 쌓인 번잡한 생각은 땀에 엉킨 머리카락처럼 쉬이 정리되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가만한 상태를 유지한들, 결국 소란한 릴스만 주야장천 볼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다.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한다.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이 도처에 있는 곳. 어제와 내일이 주는 혼란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곳. 자연 앞에서 내 존재가 한없이 미미함을 느낄 수 있는 곳. 그리하여 고성과 남해다. 조용한 바다 마을을 하염없이 걷고, 차를 마시며 마음을 녹이고, 다정한 공간에서 무언의 위로를 받아야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또 그에 감응할 수 있을만한 마음의 공백을 만들어야지. 그렇게 하나하나 비워낸 뒤 찬란한 것으로 채워내길 소망하며 경상남도 고성과 남해로 떠날 것이다.
김연덕 <폭포 열기>
‘조용한,// 근섬유의, 사나운,// 그런 아름다움 앞에 말을 잃기 위해서만 가끔/ 사는 것 같아.’ 김연덕의 새 시집 <폭포 열기>에 수록된 ‘나의 레리안’의 첫 구절이다. 시집 <폭포 열기>에는 어떤 용기가 있다. ‘나’라는 공고한 성 안에서 느끼던 안전함을 내려두고, 폭포와 같은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바깥’으로 향하려는 마음. 기꺼이 타인을 끌어안고 새로움으로 뛰어드는 의지가 거기에 있다. <폭포 열기>의 여러 시편 중에서도 앞서 언급한 ‘나의 레리안’을 읽으며 여행의 문을 열려고 한다. 사실 여행지에서 낯선 풍광을 보고 있어도, 어떤 ‘머리 아픈 기억’은 부끄러움을 동반한 채 우리를 습격하곤 한다. 하지만 이 시는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내내 끝나지 않던 한 순간이 약한 섬광과 함께 죽어버리는 것 오래된 1초를/ 죽이는 것’이라고. 여행을 통해 ‘내내 끝나지 않던’ ‘오래된 1초를 죽이고’ ‘깨끗한 기분을 몇 초간 느끼’고 싶다. 그런 섬광과 같은 아름다움을 목격하길 바라며 고성으로 향할 것이다.
천광요
여행의 목적지를 경남으로 정한 가장 큰 이유는 ‘천광요’에 있다. 천광요는 도예가 박용태의 작업 공간이자 그의 가족이 머무는 생활 터다. 박용태 작가의 백자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그의 아내와 딸이 진행하는 티 푸드 클래스, 쿠킹 클래스, 절기회 등의 문화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취재를 위해 천광요를 방문한 이후로 내면이 어지러울 때면 이곳에서 바라보던 벽발산을, 세 사람이 보여준 환대를, 차를 마시며 누그러졌던 마음을 떠올렸다. 사실 천광요에 가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박용태의 달항아리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작가는 달항아리를 “서로 다른 운동 방향성의 두 반구가 하나의 커다란 원을 그리는 것”이라 설명하며 “탄생된 원 안에는 무한한 에너지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두 개의 반구가 함께 만드는 하나의 구. 불완전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그것을, 영원히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박용태 작의 백색을, 가만히 응시하고 싶다.
add 경남 고성군 고성읍 월평3길 265
흙기와
남해의 주택가 한가운데 흙 기와로 지은 집 한 채가 있다. 주인장이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커피를 내리는 책방 ‘흙기와’다. 서점에는 책방지기의 취향과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담길 수밖에 없다.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존엄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는 주인장의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부터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 프란츠 카프카의 <우연한 불행> 등 서점의 큐레이션을 따라가다 여행과 함께할 책 한 권을 고르려 한다. 여행이 끝난 뒤 일상에서 다시 그 책을 마주할 때, 이곳에서 느낀 소리 없는 배려를, 아늑하고 고요한 시간을, 남해를 거닐던 기억을 몇 번이고 곱씹을 거라 생각하며 말이다.
add 경남 남해군 남해읍 화전로38번길 28-25
앵강스테이
하루의 일정이 마무리될 때쯤 남해 바닷가를 걷고 싶다. 그러다 백사장에 가만히 앉아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파도가 철썩이는 광경을, 하염없이 반복되는 자연의 무구한 움직임을 보고 싶다. 앵강만 근처에 위치한 ‘앵강스테이’는 남해를 온전히 느끼며 느긋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걸어서 5분이면 바다를 보러 나갈 수 있고, 독채 숙소라 어떤 방해도 없이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차실에서 직접 잎차를 내려 마시다가, 저녁이 되면 정원에 앉아 장작불을 태운 뒤,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슬쩍 올려다볼 것이다.
add 경남 남해군 이동면 남서대로197번길 37-3
instagram @stay_aeng
엔젤스 엔비
새까만 밤이 되면 서울에서 고이 모셔 온 버번위스키, ‘엔젤스 엔비’를 한 모금씩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할 것이다. ‘엔젤스 엔비’라는 이름에는 ‘천사들이 맛보지 못해 질투한 위스키’라는 귀여운 의미가 담겨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위스키에는 예사롭지 않은 점이 있다. 버번위스키임에도 루비 포트 캐스크에서 6개월간 추가 숙성을 거쳤다는 것. 버번 특유의 바닐라 향을 진하게 풍기면서도 마지막에 달콤한 포트와인의 풍미가 더해져 긴 여운을 남긴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복합적인 맛과 향을 느끼며, 적당한 취기와 함께 잠에 드는 것만큼 완벽한 하루의 끝이 있을까.
유즈노모레
남해 독일마을 아래, 한적한 시골 주택가에 있는 한 카페. 불가리아어로 ‘남쪽 바다’라는 뜻을 가진 ‘유즈노모레’는 불가리아 전통 디저트와 브런치 메뉴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가면 감자 퓌레와 남해 마늘로 감칠맛을 살린 불가리아의 고기 요리 ‘불독’을 꼭 먹어야 한다. 그리고 남해 유자를 올린 ‘유자 바클라바’ 역시 맛봐야 하고, 에스프레소 위에 크림을 풍성하게 올린 ‘유즈노크렘’까지 곁들이면… 비로소 완벽해진다. 작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만끽하고, 카페 앞에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기 좋은 곳.
add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동부대로1030번길 104
instagram @_yuznomore
박솔뫼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좋은 일이 일어남>
여행의 마지막 날엔 좋은 책을 읽다가 잠에 들고 싶다. 그러니 박솔뫼 소설가의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좋은 일이 일어남>을 읽다 잠들어야만 한다. 이 책은 박솔뫼가 좋아하는 소설에 관한 에세이다. 로베르트 볼라뇨부터 리처드 브라우티건까지. 박솔뫼는 자신이 애정을 품은 작가와 그들의 소설,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깊은 사유를 담되, 투명하고 덤덤하게. 도착지를 정해두지 않고 산책하는 사람처럼 글을 밀고 나가는데, 그걸 따라가다 보면 좋아하는 마음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이야기의 힘이 어찌나 거대한지 새삼 느낄 수 있다. 박솔뫼가 에세이에 쓴 마이조 오타로의 소설 제목을 한 번 더 빌려 표현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좋아좋아 너무좋아 정말 사랑해’의 상태가 된다고.
미야케 쇼 <새벽의 모든>
여행을 마무리하며 미야케 쇼 감독의 <새벽의 모든>을 볼 것이다. 영화는 생리전증후군(PMS), 그리고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두 주인공을 조명한다. 두 사람은 가족도 연인도 아닌 직장 동료지만, 서로를 세심히 보살핀다. 아픔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지만, 상대의 고통을 단정 짓지 않는다. 그저 나를 헤아리는 당신이 있음에 위로받으며 느슨한 연대를 형성할 뿐이다. “기쁨이 가득한 날도 슬픔에 잠긴 날도 지구가 움직이는 한 반드시 끝난다. 그리고 새로운 새벽이 찾아오는 것이다.” <새벽의 모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대사는 따스한 아침 햇살처럼 관객을 비춘다. 오늘은 어떻게든 끝나며 결국 새로운 새벽이 밝을 것이라는 그 자명한 사실을 되새기며, 여행의 매듭을 짓고 내일로 나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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