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
그때 소년은 곰을 보았다. 어디선가 나타나거나 숨어 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그냥 거기, 꼼짝도 하지 않고, 바람 한 점 없는 정오의 뜨거운 햇살이 얼룩무늬를 그리며 내리꽂히는 풀밭에 서 있었다. 곰은 소년이 꿈에서 본 것만큼은 아니어도 기대했던 것만큼 컸다. 햇발로 얼룩진 그늘 속에서 소년을 바라보고 있으니 더욱 거대하고 무한해 보였다.
- 윌리엄 포크너, 『곰』 (문학동네, 2015)
오늘날의 우리는 섭취 열량을 관리하고 액상과당을 적게 먹는 것에 집중하지만, 서부개척민들은 말 그대로 굶어 죽지나 않을지 매일매일 걱정했다.
이들은 당장 오늘 굶지않기 위해 끊임없이 사냥했고, 내일 굶지 않기 위해 오늘 사냥한 것들을 소금에 절였다.
서부개척민들의 곁에는 늘 굶주림과 영양실조, 그리고 그로 인해 취약해진 몸을 갉아먹는 각종 질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개척민들은 대부분 자급자족했다. 자신의 농지에서 농산물을 수확하거나, 주변의 황무지 자연환경에서 채집한 것을 식단으로 삼은 것이다.
상점에서 식료품을 구매하는 행위는 극소수의 희소품들에만 국한되었다. 뿐만아니라 쇼핑은 갖가지 위험요소를 갖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식품위생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매한 밀가루의 절반가량이 실은 모래가루일 수 있었다. 또한 옥수수가루에는 톱밥이 섞여있을 수도 있었으며, 커피콩 사이에 구운콩이나 자그마한 자갈들이 끼어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기를 당하는 것도 몇몇 개척민들만의 특권이었다. 대부분의 개척민들은 너무 외딴 곳에 거주하여 식료품 상점에 접근조차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개척민들의 식량은 대부분 농장 텃밭에서 난 것으로 충당되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연간 두 개의 정원을 번갈아 사용했는데, 봄에는 푸른 채소들과 완두콩, 무를, 여름에는 호박, 콩, 감자 같은 것들을 재배했다.
이런 텃밭 가꾸기는 평화로운 전원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호시탐탐 텃밭의 작물을 노리는 다람쥐, 사슴, 까마귀, 심지어는 곰이 출몰하곤 했기 때문이다. 텃밭의 작물을 수확하기 위해선 야생동물들과의 혈투가 필수적이었다.
뿐만아니라 딱 한번의 폭우나 서리같은 기후이변이 있을 시 반년 동안 농사지은 모든 것들이 헛수고가 되곤 했다.
개척민들은 직접 재배한 작물 이외에도 주변의 야생에서 식용 식물들을 채집하곤 했다. 몬태나 남부에서는 강가에서 물냉이(watercress), 앵두나무, 블루베리 등이 자랐다.
그러나 채집을 할 때도 주의해야했는데, 거대한 곰들도 야생 베리를 매우 좋아해서 곧잘 출몰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집을 할때엔 꼭 2인 1조가 되어 한 명이 베리를 따는 동안 다른 한 명은 곰이 오는지 감시를 해야했다.
개척지에서는 균형잡힌 식단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괴혈병을 비롯하여 각종 영양 관련 질병에 걸려 순식간에 생을 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식료품들로 구성된 균형잡힌 식단을 위해서, 개척민들은 수확하거나 채집한 식량들을 겨울을 나는 동안 보존할 수 있게끔 처리했다.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우선 말리는 것이다.
과일류를 오두막 지붕과 같은 볕이 잘 드는 곳에 쭈글거리고 딱딱해질 때까지 말린 뒤 지하실이나 창고에 걸어두었다가, 몇 달이 지나 먹어야할 때가 오면 물에 불려두었다가 끓여서 먹었다. 말린 과일은 물에 불리고 끓였음에도 질기고 맛이 별로 없다.
고기를 보존하는 데에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이 들었다. 소수의 개척민들은 닭 몇마리를 직접 길러서 잡아먹었고, 대부분의 개척민들은 그보다 사냥을 선호했다.
사냥감은 다양했는데, 사슴, 꿩, 들칠면조, 토끼, 물고기, 심지어는 곰이었다. 개척지의 후덥지근한 여름날엔 아침에 잡은 신선한 사냥감이 해가질 때쯤에 벌써 상할 수 있었기에, 즉각 보존 처리되어야만 했다.
삶거나 굽는 것만으로도 며칠간은 보존이 가능했는데, 약간 맛이 이상해지기 시작하면 소금을 뿌려먹었다.
염초(질산 칼륨)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해선 애초부터 훨씬 더 많은 소금에 푹 절이는 방식이 사용됐다. 암염과 염초, 그리고 설탕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만든 소금물에 고기를 절였는데, 소금물의 염도는 상당히 높았기에, 이렇게 염장한 고기를 먹으려면 염분기를 빼내는 아주 고생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겨울이라면 보존은 좀 더 간편해진다. 개척지의 가혹한 겨울이 주는 한 가지 이점이 있다면, 고기에 별다른 처리를 하지 않아도 그저 밖에 놔두는 것만으로도 꽝꽝 얼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우물 속의 버터'는 북유럽 이민자들이 대초원 개척지에 적응하는 모습을 담은 역사 소설 시리즈다.
그러나 얼음을 쓸 수 없는 다른 계절의 경우, 개척민들은 버터와 같이 차갑게 식혀야하는 식량을 동네의 개울이나 우물 속에 있는 흙으로 된 항아리에 보관하기도 했다.
염장과 냉동 말고도, 며칠이고 연기나는 불을 고기 아래에서 지피고 관리해주면 힘든 시간을 보내야하는 '훈제'는 고기를 보존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이렇듯 식재료를 준비하고 나서 본격적인 요리가 시작되었다.
개척민들은 주로 벽난로에 있는 화구를 통해 조리를 했는데, 더치 오븐(Dutch oven)이라고 불리는 철 냄비가 쓰이곤 했다. 이 때의 요리는 주로 '감'을 통해 이루어졌다. 운이 좋으면 먹을만한 음식이 나오는 것이었고, 운이 나쁘면 맛은 포기해야했다.
점차 요리에 대한 과학적 방법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10분마다 더치 오븐에 종이를 찢어 넣고 색이 까맣게 변하는지, 혹은 불에 사그라들어버리는지 예의주시하는 방법이 그 중 하나였다. 종이가 밝은 갈색으로 노릇해진다면, 작은 빵이나 파이를 만들기에 딱 적당한 것이었다.
몇 권의 조리책이 출판되어있긴 했지만, 요리의 레시피는 주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구전되었다. 재료의 양은 정확한 양으로 측정되지 않았고, '한 꼬집'이나 '한 줌'처럼 어림짐작 되었다.
재료의 부족으로 인해 개척민들이 먹고 싶어했던 요리들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충 떼우는 식으로 주로 대체된 식재료들이 사용되었다.
비싼 설탕 대신 당밀이, 레몬 대신 식초가 사용되곤 했다.
개척민들이 커피를 마시는 것은 상당한 사치였다. 이들은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라도 내기 위해, 당밀에 담근 밀기울을 오븐에 구워 검게 태웠고, 그걸 갈아서 물에 타마시곤 했다. 설탕에 생강을 조금 넣고 당근을 졸이면 '대체 오렌지 잼'을 만들 수도 있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19세기 서부개척민들의 음식을 먹는다면, 분명 엄청나게 짜고 쓰고 기름진 그 맛에 질색하면 다행이고, 배탈이 날 수도 있다.
서부는 쉽지 않은 장소였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루에 30분도 운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서부개척민들은 이런 음식을 먹으며 하루의 상당 부분을 끔찍할정도로 고강도의 육체노동으로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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