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대한 단상

영화관에 대한 단상

아레나 2024-11-04 09:00:39 신고

언젠가부터 영화관에 잘 가지 않는다. 볼 영화가 없어서? 다른 볼 게 많아서? 사람 많은 게 불편해서? 그냥 안 가다 보니까? 영화관에 가는 건 첫 번째 문화생활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지금을 관통하는 추억의 매개체이기도 했다. 그런 영화관이 멀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에 대한극장이 문 닫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만히 영화관을 떠올려봤다 . 영화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지?

“대한극장에는 그런 상징성이 있었다.
영화에 대해 강렬한 첫인상을 선사한 곳. 그래서 폐업 소식에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었다.
대한극장이 사라진다는 건 영화관 하나가 문 닫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건드렸다.”


한 시대가 지나간다

대한극장이 문을 닫았다. 1958년 문을 연 이후 66년 만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단관 극장의 마지막. 시기의 문제일 뿐 마지막을 예상한 사람은 많았다. 그동안 충무로 극장가를 조성한 영화관들이 하나둘 문을 닫은 까닭이다. 단성사와 명보극장은 2008년, 서울극장은 2021년 폐업했다. 대한극장은 3년 더 버틴 셈이다. 예상했어도 막상 소식을 접하니,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왜 아니겠는가. 대한극장은 상징성이 있었다. 국내 최초의 창문 없는 영화관. 처음으로 영화를 볼 때 빛이 방해하지 않도록 설계했다. 1958년에는 과감한 설계였다. 70mm 와이드 필름을 초대형 화면에서 상영한 국내 최초의 영화관이기도 했다. 영화의 몰입도를 극대화하는 영화관으로 대한극장은 각인됐다. 환경이 좋으니 할리우드 대작도 많이 상영했다.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지금의 고전이 당대 흥행작으로 대한극장과 함께했다. ‘한국에서 가장 좋은 영화관.’ ‘대작을 보려면 대한극장으로.’ 대한극장을 얘기할 때 이런 문구가 따라왔다. 호시절이었다.

서울 혹은 수도권에 사는 사람마다 대한극장에 얽힌 추억 하나쯤 있을 게다. 물론 나한테도 있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 대한극장은 <피라미드의 공포>를 볼 때였다. 1988년 호돌이가 굴렁쇠 굴리던 시절이었다. 가족과 함께 본 첫 번째 영화였다. 그전에도 영화관에 간 기억은 흐릿하게 떠오른다. 너무 어렸고, 섬광 같은 장면 수준이다. 누가 데려갔는지도 불분명하다. <피라미드의 공포>에 관한 기억은 다르다. 가족이 손잡고 영화를 본 기억이 분명하다. 가족이 손잡고 영화를 보다니.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기에 또렷이 기억한다. 그때 가족이 함께 영화관에 가는 건 지금 아프리카 오지 어디쯤 여행하는 것과 같았다. 내겐 그 정도로 신선한 일이었다. 개인사의 중요한 순간이 대한극장에서 일어났다.

영화에 대한 잊지 못할 강렬한 각인도 그때 일어났다. <피라미드의 공포>의 내용은 당연히 기억하지 못한다. 몇몇 장면만이 어렴풋하게 떠오를 뿐이다. 그럼에도 선명한 건 내내 놀랐던 기억이다. 화면은 하늘처럼 크고 넓었으며, 우렁찬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화면에선 현실 같은 환상, 환상 같은 현실이 펼쳐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컴퓨터그래픽이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라시오타역으로 들어오는 기차’ 영상을 보고 놀라 자빠진 파리 시민처럼, 난 내내 놀라고 놀랐다. 세상에 이렇게 놀라운 세계가 있다니. 대한극장은 놀라운 세계를 펼쳐 보인 공간이었다. 영화관에 가면 놀라운 무언가를 볼 수 있다. 그때부터 내게 영화관은 그렇게 각인됐다.

대한극장에는 그런 상징성이 있었다. 영화에 대해 강렬한 첫인상을 선사한 곳. 그래서 폐업 소식에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었다. 대한극장이 사라진다는 건 영화관 하나가 문 닫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건드렸다. 생각이 많아졌다. 더 이상 영화관이 놀라운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장소로서 힘을 잃었다는 뜻은 아닐까. 아니, 요즘 그런 생각이 들던 차에 대한극장 폐업 소식이 그 생각을 증폭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언제 마지막으로 영화관에 갔더라?

“멀티플렉스 시대가 저물어간다. 즉, 영화관이 마트처럼 동네마다 즐비한 시대 말이다.
시대는 사람이 만들어간다. 사람들이 바뀌었으니 시대도 바뀔 수 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영화관에 간다는 건 커다란 유희였다. 예전엔 분명했다. 긴 세월 이 명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비디오 플레이어가 가정에 한 대씩 생겼을 때도, 컴퓨터로 영화를 다운로드해 볼 때도 영화관엔 갔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힘이 영향력을 발휘했다. 좌석에 앉아 큰 화면을 바라볼 때의 낯선 시각적 자극. 광고가 끝나고 본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암전될 때의 두근거림. 화면이 밝아지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기대감. 내용에 따라 술렁이는 공간이 주는 묘한 유대감. 어두운 공간에서 누군가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긴장감.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차오르는 어떤 여운. 그 일련의 감정은 영화관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영화가 재밌었는지 별로였는지에 따라 진폭은 있지만, 영화관이 주는 감흥은 언제나 매력적이었다. 어딘가로 가서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에서 영화관은 언제나 첫 번째 선택지였다. 여자와 데이트할 때도, 친구와 시간을 보낼 때도 영화관을 찾았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들끼리 영화관에 가는 횟수는 줄었다. 대신 여자와 함께하는 횟수가 늘었다. 재화와 시간은 한정돼 있고, 난 선택해야 했으니까. 우리 모두 삶의 중심에 여자를 놓는 시기가 있다.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자부한다. 친구도 같은 마음으로 나 말고 여자와 함께했을 테다.

혼자 가는 경우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좀 본다 하면 혼자 영화관에 가봐야지. 이런 마음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혼자 보겠다고 선택한 영화가 하필 <쥬라기 공원>이어서 낭패를 본 슬픈 추억도 있다. 홀로 외톨이처럼 조용히 화면만 봤다. 팝콘도 안 먹고. 잔잔한 영화가 아닌데 시간이 갈수록 차분해졌다. 혼자 볼 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피하는 게 좋다는 교훈도 얻었다.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그 후에도 혼자 종종 영화관에 갔다. 확실히 혼자 영화관에 가면 영화와 영화관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어두운 영화관 화면이 밝아질 때 판타지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 설레기도 했다. 한창 영화관에서 영화 많이 볼 땐 그랬다.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기간을 거쳤을 테다. 지금은 영화관에서 언제 혼자 영화를 봤는지 가물가물하다.

예전처럼 영화관에 가지 않게 된 계기는 분명했다. 팬데믹과 OTT. 팬데믹은 삶의 많은 부분을 달라지게 했다. 그 시기를 겪으며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몸으로 겪었다. 그런 상태가 몇 년 동안 지속되자 삶의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팬데믹이 끝나고 예전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오지 못한 부분도 존재했다. 아니, 돌아가지 않아도 별 문제 없다는 인식이 생겼다. 영화관에 가지 않는 걸 상상하지 못하던 삶은 이제, 그땐 그랬지 하는 회상으로 남았다. 더불어 OTT가 급부상했다. 일단 볼 게 많아졌다. 넷플릭스 시리즈는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개봉 영화 역시 금세 OTT로 넘어왔다. 조금만 기다리면 익숙해진 시청 형태로 감상할 수 있다. 영화를 보려면 영화관에 간다는 보편적 행위가 더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바뀐 인식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습관처럼 익숙해졌다. 확실히 무게 추가 기울었다. 물론 예전처럼 영화관에 가는 사람은 당연히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인식이 달라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한 번 기울어진 무게 추는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언제 영화관에 갔는지 기억을 더듬어야 할 정도로. 그만큼 거실에서 OTT를 보는 시간은 늘어났다. 일단 나부터.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복합적이다. 원래 변화가 일어날 땐 영향을 미치는 원인 여러 개가 맞물리는 법이다. 팬데믹이 결정적이지만, OTT가 부상하지 않았다면 또 다를 수 있다. 그 두 요소의 영향일까. 팬데믹이 끝나고 티켓 가격이 상승했다. 그에 반해 볼 만한 영화가 적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OTT 자체 제작 영화나 시리즈가 더 화제를 모았다. 팬데믹 때문에 영화관 대신 OTT로 향한 영화가 대거 등장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관심은 더욱 OTT로 몰렸다. 스마트폰 속 숏폼 영상이나 유튜브 영상이 일상화된 이유도 있다. 작은 화면으로도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시청 형태의 습관을 알게 모르게 바꿔놓았다. 세상에는 볼 게 너무나 많아졌다. 게다가 크게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척척 눈앞에 펼쳐놓았다.

예약하고 몸을 움직여 영화관에 가기까지 장애물이 많아졌다. 그냥 내가 나이를 먹어 무언가를 본다는 게 심드렁해졌는지도 모른다. 나만 나이 먹은 거 아니니 그런 사람이 늘어난 것일 수도 있다. 다분히 복합적이다. 영화관의 위기라는 말이 여지저기서 들린다. 멀티플렉스의 수익을 걱정하는 경제 기사가 늘어났다. 실제 영화관 수도 하나둘 줄어들었다. 영화 대신 공연 영상을 트는 경우도 늘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안 보면 그게 영화관일까. 이런 흐름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다. 멀티플렉스 시대가 저물어간다. 즉, 영화관이 마트처럼 동네마다 즐비한 시대 말이다. 시대는 사람이 만들어간다. 사람들이 바뀌었으니 시대도 바뀔 수 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질이 바뀌진 않는다. 영화관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은 그대로다.

예전에는 1년에 열 번 갈 걸 한 번 갈 뿐이다. 규모는 줄어도 영화관이 사라지진 않을 거다. 여전히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니까. 대신 여러 가지가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티플렉스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영화관이 태동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영화관이 영화만 보는 장소가 아니라 그곳에 가고 싶어 영화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 최근 자기 색깔을 담은 개성 있는 영화관도 하나둘 생겼다. 성수동의 ‘무비랜드’ 같은 영화관. 물론 개봉 영화를 상영하는 개봉관 역할은 하지 못한다. 취향을 담은 만큼 취향이 확실한 예전 영화를 골라 보여준다. 영화관이라는 형태를 취한 디자인 공간으로도 볼 수 있다. 전체 영화 산업으로 보면 해변의 모래알 같은 존재다. 하지만 어떤 불씨가 될 수 있진 않을까.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감흥을 되살릴 공간. 시청 습관을 바꿔 몸을 움직이게 할 계기.

멀티플렉스는 편하지만 공산품 같다. 수요가 적어지면 쌓인 공산품은 더욱 안 팔린다. 그 안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면 대량생산이 아닌 수공예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시간과 이야기가 쌓일 때 그 영향력은 더욱 커지니까. 그럴 수 있는 대한극장이 문을 닫았다. 생각이 더 많아진 이유다.

영화관이 선물한 우주

영화관을 기억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그곳에서 보았던 영화로 기억하는 것과 함께 간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 내게 영화관에 대한 가장 오래된 추억은 2001년 엄마와 함께 찾은 아카데미 극장이다. 우리 모자가 다른 영화관이 아닌 아카데미 극장을 찾은 이유는 단순하다. 시내버스로 갈 수 있는 영화관이 아카데미 극장뿐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구미는 경상북도 안에서나 큰 도시지 서울 사람들에게는 지방 시골이었다.

그 무렵 영화관 광고판에 가장 많이 붙어 있던 포스터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인 걸로 기억한다. 영화관 근처 풍경은 생각나지만, 아카데미 극장에 대한 기억은 흐릿했다. 여기까지 원고를 쓰고, 팩트 확인차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카데미 극장은 어떤 영화관이었을까? “글쎄다. 그때는 조조영화를 많이 보러 갔어. 아줌마들이 할 게 뭐가 있니. 아침 일찍 영화 보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아이들이 조금 시끄러워도 눈치 볼 사람이 없었거든. 아, 그리고 믹스커피. 영화관 여사장님이 날마다 제일 처음 온 손님한테는 믹스커피를 줬어요.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아침 8시 극장에서 마시는 공짜 믹스커피의 맛. 2024년 서울에 사는 내게는 상상할 수 없는 맛이다.

내가 지금까지 생생히 떠올리는 건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보고 받았던 충격이다. 영화가 시작되자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흰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할아버지가 걸어 나왔고, 그는 정체 모를 라이터(라이터가 아닌 딜루미네이터였다)를 들고 프리빗가 4번지 가로등 불빛을 하나둘 빨아들였다. 곧이어 맥고나걸 교수라고 불리는 고양이가 마녀로 변신하고, 하늘 위에서 모터사이클을 타고 나타난 털보 거인이 굉음을 내며 착륙했다. 영화가 시작된 지 1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는 “이런 영화도 있을 수 있구나”라는 말을 반복했고, 학교로 돌아간 나는 한동한 청소 시간에 빗자루를 다리 사이에 낀 채 뛰어다녔다.

아카데미 극장에서의 두 번째 충격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상영한 이듬해 1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가 개봉했다. 맨발의 호빗, 백발의 엘프, 진흙탕의 우르크하이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세 시간이 지났을 무렵, 아카데미 극장은 1년 뒤 반드시 찾아야 할 곳으로 자리 잡았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이 1년 간격으로 개봉했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끝난 후에도 기다림은 이어졌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남아 있었으니까. 아카데미 극장은 해리포터가 불사조 기사단을 만날 무렵 문을 닫은 걸로 기억한다. 비슷한 시기 구미 시내에는 롯데시네마와 CGV가 들어섰고, 나는 교복을 입는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영화관은 1년간의 궁금증과 기다림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가장 영화관다운 영화관

영화 <7번방의 선물> 개봉을 이틀 앞둔 2013년 1월 21일. 포항에 있는 해병대교육훈련단으로 입대했다. 7주간의 신병교육이 끝나고 나는 교육훈련단 정훈병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훈련병 시절에는 몰랐지만 당시 정훈병에게는 아주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매주 토요일 저녁 부대 안에 있는 소극장에서 영화를 트는 일이었다. 어떤 영화를 틀지는 100% 정훈병의 권한이었다. 정훈공보실 벽 한편에는 DVD가 가득 꽂혀 있었고, 정기적으로 신작 DVD를 주문하는 것도 정훈병의 일이었다. 불특정 다수의 젊은 해병을 만족시킬 영화를 고르는 것. 이병이었던 내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름 자신도 있었다. 입대 전 문예창작학과에서 비평을 공부했다. 흔히 ‘시네필’이라면 으레 봐야 한다는 영화들을 모아 리스트를 만들고 주말마다 챙겨 봤다. <강원도의 힘> <화양연화> <지구를 지켜라!>를 볼 때면 지루함에 온몸이 배배 꼬였지만 마지막까지 노트북 화면을 노려봤다. 그때는 ‘이 영화 좋지’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두고 싶었다. 너희들이 영화를 알면 얼마나 알겠어.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골랐다.

첫 상영작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1부>. 내게 <킬 빌>은 영화평론가도, 살면서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주인공 베아트릭스 키도(우마 서먼)가 피범벅이 된 채로 영화가 끝났을 때는 내심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래, 이게 영화지. 영화 상영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오자 한 선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예상과 달리 유쾌한 대화는 아니었다. <킬 빌> 이후로도 나는 개의치 않고 다양한 장르 영화를 틀며 나름대로 데이터를 쌓아갔다. 하지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틀었던 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극장을 빠져나가는 대원들을 봤을 때는 내 안의 영화에 대한 자신감도 함께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매번 반응이 좋지 않았던 것만은 아니다. 당시 인기였던 제임스 완의 <컨저링> <인시디어스>는 귀신 잡는 해병들을 녹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민규동 감독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상영했을 때는 몰래 눈물을 훔치는 선임들을 지켜보면서 흐뭇해하던 기억도 있다.

내가 2년간 영화를 틀고 보았던 포항의 소극장을 영화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내게 그곳은 지금까지도 가장 영화관다운 영화관으로 남아 있다. 가장 지적 허영이 없는 영화관. 그저 눈앞의 장면이 재미있으면 웃고, 무서우면 소리 지르고, 슬프면 눈물 흘릴 수 있는 영화관. 주말마다 영화를 봐야 한다면, 이런 영화관에서 보고 싶다. 최근 포항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짧은 동영상을 하나 발견했다. <사랑의 하츄핑>을 관람하러 간 아이들이었다. 무릎 위에 팝콘을 올려놓고 울고 웃는 아이들. 10초 남짓 짧은 동영상을 보며 내심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박종진

“내게 영화관은 익숙한 장소 중 가장 특별한 장소다.
동시에 특별한 장소 중 가장 익숙한 곳이기도 하다.”

단둘이 영화 본 사이가 되는 것

도시에서 혼자 살다 보면 그런 날들이 있다. 금요일 저녁 칼같이 퇴근은 했는데 그냥 집에 들어가기는 아쉬운 날. 이상하게 그날따라 친구들이 선약을 잡은 날. 그냥 포기하고 집에서 쉬어도 되지만, 왠지 그러기에는 나 자신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날. 그런 날이면 영화관에 갔다. 30대가 된 후로 영화관을 찾는 이유는 두 가지로 좁혀졌다. 보고 싶었던 영화를 큰 화면으로 보고 싶을 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을 때. 내게 영화관은 익숙한 장소 중 가장 특별한 장소다. 동시에 특별한 장소 중 가장 익숙한 곳이기도 하다.

2019년 크리스마스이브. 눈이 내리지 않는 아주 추운 날이었고, 만나던 사람도 만날 사람도 없는 시기였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늦은 저녁 643번 버스를 타고 이수 아트나인에 갔다. 영화가 끝나면 크리스마스겠구나. 이날 <윤희에게>를 봤다. 설원을 뒤로한 채 머플러를 두른 김희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그후로도 이수 아트나인을 종종 찾으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수 아트나인은 일반 영화관과 다르다.

차이점은 세 가지. 첫 번째, 팝콘을 먹을 수 없다. 음식물 반입 자체가 금지다. 두 번째, 상영 전 광고 시간이 없다. ‘어차피 광고 하니까 천천히 들어가자’ 했다간 전반부를 놓치고 만다. 마지막 세 번째, 엔딩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가기 전까지 객석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 이수 아트나인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서초/강남/이수를 아우르는 강남 최초의 예술 영화관’. 포항의 그것과는 정반대 콘셉트지만, 이수 아트나인 역시 영화관다운 영화관이라 말할 수 있다. 영화 관람에 방해되는 모든 걸 덜어내고, 영화의 마지막 호흡까지 지켜볼 수 있게 해주는 영화관. 무엇보다 이곳은 ‘보고는 싶은데 다른 극장에서는 틀지 않아 못 보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수 아트나인에서 본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이다. 영화가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줄거리는 전혀 몰랐다. 포스터만 봤을 때는 재난 영화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 1부가 끝날 무렵 퀴어 영화임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내 눈에 안 보이던 것들이 들어왔다. 왼쪽 좌석에 있던 두 남자 관객은 서로 어깨를 포개고 손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오늘이 특별한 날로 기억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영화관을 나왔다. 이번 기사를 쓰는 동안 <비긴 어게인> 재개봉 소식을 듣고 강남 CGV를 찾았다. 사실 이 영화는 내가 보고 싶어 고른 영화는 아니다. 여자친구는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로 ‘네가 아직 군인이고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본 영화. 언젠가 다시 본다면 꼭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던 영화’라고 설득했다. 영화관은 여행 같은 면이 있다. 혼자 가도 즐겁지만 둘이 가면 더 즐겁다. 영화가 끝나면 한동안은 함께 본 영화 이야기로 분주하다. 나는 이게 좋았는데 너는 그게 좋았구나. 서로가 보지 못한 공백을 채워가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자신의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서 질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썼다.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그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영화관은 우리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가장 로맨틱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두 시간 넘게 바라볼 수 있는 장소는 많지 않다. 영화관은 서로의 생각뿐만 아니라 관계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그냥 친구 사이’와 ‘둘이서 영화 본 사이’는 완전히 다른 사이다. 내가 보고 싶지 않은 영화를 보는 데 두 시간 동안 시간을 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 영화 티켓이 바싸다고들 한다. 선택은 자유지만 1만5000원이 아까워 영화관에 가기 싫다면, 아직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한다.

2024년 11월호

Editor : 김종훈, 주현욱 | Image :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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