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승리할지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도 이번 미 대선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선 결과에 따라 한반도 정세는 물론 북한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대선 결과를 향한 탈북민들의 관심은 최근 북한 당국이 러시아에 파병하면서 더욱 고조되는 양상이다.
탈북민들은 카멀라 해리스 후보와 도널드 트럼프 후보 중 누구의 당선을 더 바라고 있을까. BBC는 한국 각지의 탈북민들을 만나 그들의 입장을 직접 들어봤다.
탈북민들의 의견은 다양했지만, 한반도 평화와 북한 주민에 대한 인권 보장을 바라는 공통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일부 탈북민들은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상당한 우려감을 표시하며 한반도 평화를 넘어 강력한 국제 질서 유지를 희망했다.
이들은 북한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책임있는 리더가 당선되길 기대했다. 대체적으로 해리스 민주당 후보의 외교적 접근에 희망을 거는 탈북민들이 많았지만,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재집권이 한반도 긴장 완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 의견도 있었다.
'강력한 리더십 필요'
서울의 한 경기장에서 만난 박명호 씨(60)는 “트럼프 후보가 재집권하는 게 한반도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 청진에 살았던 박 씨는 2006년 아내, 두 아들과 목선을 타고 탈북했다. 현재 박 씨는 가족과 함께 강원도 고성에서 횟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날 경기장에서는 1만여 명의 실향민과 탈북민이 함께하는 체육대회가 열렸다.
박 씨는 운동장에서 진행되는 팽팽한 줄다리기 경기를 지켜보며 "북한은 수십 년간 변화하지 않았지만, 트럼프는 김정은을 세 번 만나며 변화를 시도했다"면서 "트럼프의 강력한 리더십이 북한의 개방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 씨는 미국이 국제 질서를 바로 잡는 강력한 역할을 해야 한다며, 트럼프 후보와 같은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익명을 요구한 정모 씨(81)는 북한 당국이 러시아에 파병한 사례를 언급하며 북한에 남겨 두고 온 아들 걱정에 잠이 안 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평양 출신으로 2017년 한국에 정착한 그는 "최근 북한이 남북을 연결했던 경의선과 동해선을 폭발시켰고, 러시아에 파병까지 하고 있는데, 파병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며 “통일될 일은 앞으로 더 희박해 보인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어 “얼마나 더 많은 북한 젊은이들이 러시아로 파병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며 “북한 정권을 제지할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했다.
2019년 8월 탈북한 채윤서 씨(27)는 북한에서 세 차례의 북미정상회담을 지켜봤기에 미국 대선을 바라보는 느낌이 남다르다.
트럼프 후보는 2018년 취임 초기 김정은 위원장과 대립하다가 그해 6월 12일 싱가포르, 2019년 2월 27일 베트남 하노이, 그리고 2019년 6월 30일 판문점 등 세 차례에 걸친 정상회담을 가졌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러브 레터'로 규정한 친서 외교를 하면서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등 개인적인 친밀감을 표시했고, 당시 북한 매체들은 북미정상회담 등의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북한에서 간호사 양성 학교에 다녔던 채 씨는 당시 북미정상회담 관련 뉴스를 보면서 주민들의 경제난이 나아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당국의 엄격한 통제로 인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채 씨는 회상했다.
채 씨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미국과의 대화 국면을 이어가면서도 뒤에서는 북한 주민들에게 적대국(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말라는 내용의 교육을 지속적으로 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북미회담은 지나가는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며 "한미 방위비 분담금 인상이 국내 갈등을 초래하고, 한미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에 트럼프보다는 해리스 후보를 더 선호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 긴장 완화가 최우선'
반면 트럼프 후보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는 탈북민도 적지 않았다.
'국내 1호 탈북 한의사'인 박수현 씨(58)는 트럼프 후보가 백악관에 복귀하는 게 한반도 전쟁 위험을 낮추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현재 경기도 성남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박 씨는 "트럼프가 김정은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이어오며 한반도 긴장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트럼프의 재집권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박수현 씨는 특히 "북한 주민들도 미국 대선 결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쟁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며, "트럼프 후보가 김정은과의 관계를 통해 전쟁 위험을 낮추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 청진에서 살다가 2001년 탈북한 장모 씨(43)도 트럼프의 재집권이 한반도 긴장 완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북한과 미국이 서로 대화하며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김정은 체제 강화 우려'
BBC가 만난 많은 탈북민들은 트럼프 후보의 대북 외교가 북한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실망감을 표시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트럼프 후보가 김정은 정권을 오히려 더 강화시켜줬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금 협정 재협상 가능성에 대한 우려감도 적지 않았다.
실향민 및 탈북민 체육대회에서 만난 함경도 출신 이모 씨(여·50)는 트럼프 후보의 대북 정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매년 열리는 이 체육대회에 참석해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는 이 씨는 "트럼프 후보는 김정은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나기만 했을 뿐, 북한 주민에게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며 “오히려 북한 정권을 띄워주는 결과만 낳았다”고 말했다.
2017년 탈북한 정모 씨(여·51) 역시 트럼프 후보의 회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녀는 "김정은을 영리하고 똑똑하다고 칭찬하며 독재자를 치켜세우거나 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후보는 지난 1월 "김정은은 매우 영리하고 터프하지만 나를 좋아했다"며 "나는 그와 잘 지냈고 안전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해리스 후보는 10월 29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 유세에서 트럼프를 향해 “독재자를 동경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며 “푸틴이나 김정은 같은 독재자들이 그를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양 출신인 김영철 씨(70대)는 "트럼프 후보가 김정은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킨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그는 “김정은은 자신의 고모부를 처형하고, 이복형을 독살한 독재자”라며 “그런데 세계 경찰이라고 불리는 미국 대통령이 그런 독재자를 ‘친구’라고 부르거나 ‘영리하다’고 평가하며 세 차례나 정상회담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트럼프 후보가 재집권하게 되면 한국의 방위비 증액이나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 등으로 인해 북한 김정은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며, "독재자를 당당하게 독재자라고 비판할 수 있는 법조인 출신인 해리스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게 북한은 물론 한국 국민들에게도 바람직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후보는 한국이 방위비를 더 부담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트럼프 후보가 재집권할 경우, 한미 방위비분담금협정(SMA)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하고 한국에게 대폭 인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트럼프 후보가 재집권할 경우 한국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고, 한미동맹 관계에 긴장감이 형성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반면 해리스 후보는 '한국 이미 상당한 방위비를 분담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특히 해리스 후보의 외교·안보 핵심 참모들은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동맹 관계의 유지와 발전 의지를 수차례 밝혀왔다.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여대생 맹효심 씨(23)는 한국과 북한 주민 모두 보다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길 희망했다.
2018년 북한을 탈출해 서울에 도착한 맹 씨는 주말에는 카페에서 일하며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다. 그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후보가 미국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맹효심 씨는 "트럼프-김정은 회담으로 북한 주민들의 삶이 나아진 건 아무 것도 없다"며 “처음에는 한미정상회담으로 한반도 평화가 올 것 같아 기대했지만, 결국 희망에 불과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한미동맹과 외교 협력을 중시하는 해리스가 한국에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며 “트럼프는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올리려고 하기 때문에 한국에 부담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맹 씨에게는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려는 꿈이 있다. 맹 씨는 학업과 아르바이트 외에도 북한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도 하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느라 힘들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북한 주민들이 받고 있는 고통을 생각하면 이건 힘든 것도 아니다”며 “하루빨리 북한인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국제 리더가 미국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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