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뒤바꾼 제주…피난 문화예술인 문학의 씨앗 뿌려
1950년대 다방서 각종 전시·강연·출판기념회 줄줄이 열려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과거 유배지로 악명이 높아 '창살 없는 감옥'이자 '피하고 싶은 변방'으로 여겨졌던 제주.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제주는 문학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씻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제주에 변화의 불씨를 지폈다.
한 때 '제주의 명동'이라 불렸던 제주시 원도심 칠성통 거리를 밝힌 불씨는 작가 '계용묵'(桂鎔默·1904∼1961)과 그를 중심으로 한 '다방문화'였다.
◇ 피난 작가 계용묵과 동백다방
「칠성통 거리는 계용묵 선생을 중심으로 한 피난문인과 제주의 문학동호인들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오가던 거리이며, 문예지 하나 둘쯤 겨드랑이에 낀 문학소년들이 무시로 오가던 거리였다. 걷다 보면 알맞은 위치에 다방이 있었고, 알맞은 위치에 소줏집이 있어 심심치 않은 거리가 칠성로였다. 제주의 문단사를 이야기하자면 제주문단의 형성 초기 이 칠성로 거리의 낭만을 빼놓을 수 없다.」(제주문학 31집, 1998년, 제주문인협회)
한국전쟁은 조용하던 제주사회를 순식간에 바꿔놨다.
'도제50년 제주실록'(1997년, 제주도)에 따르면 전쟁이 발발한 다음달인 7월에만 1만명의 피난민이 제주에 들어왔다.
이어 이듬해인 1951년 5월 20일 기준 피난민은 14만8천794명으로 급격하게 불어났다.
피난민수가 당시 제주인구(20만명)의 절반을 넘어설 정도였다.
피난민 증가로 제주는 주택·식량난에 빠졌지만, 제주 원도심 칠성통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전쟁을 피해 제주로 밀려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문화예술인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로 인해 제주문학의 산실인 일명 '다방문화'가 서서히 자리잡았다.
'백치 아다다'와 '별을 헨다'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계용묵도 피난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51년 1·4후퇴 즈음 처자식과 함께 제주로 피난 와 칠성통 일대에 둥지를 틀었다.
피난 온 작가의 삶은 매우 곤궁했다.
부인은 관덕정 인근에서 양담배 노점상을 했고, 계용묵은 얼음장 처럼 차가운 마루방의 한기를 이겨낼 방도가 없어 매일 다방으로 피신을 해야할 정도였다.
계용묵의 단골 다방은 집 근처에 피난민이 개업한 동백다방이었다.
제주문단의 원로인 양중해 시인은 생전에 계용묵과의 인연에 대해 쓴 회고록에서 "동백다방은 계 선생의 사랑방이었다. 피난생활 3년 동안을 거의 동백다방에서 살았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양 시인은 "다방은 전황을 비롯한 새로운 정보, 새로운 뉴스에 접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하고도 필요한 사랑방이었다"며 "이래서 6·25와 함께 제주시에 새로운 다방문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회고했다.
계용묵은 다방을 중심으로 양중해·김종원·고순하 등 당시 20대 제주의 문학청년들은 물론 군·경찰 등 각 기관 정훈실에 근무하는 문학동호인들과 만났고 그들이 쓴 작품을 일일이 고쳐주며 지도했다.
이어 종합교양지 '신문화'를, 제주의 첫 순수 문학동인지인 '흑산호'를 발간하며 제주에 문학의 씨앗을 뿌렸다.
계용묵은 뿐만 아니라 문학을 지망하는 중·고·대학생으로 이뤄진 '별무리' 모임을 지도해 동명(同名)의 동인지를 간행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별무리의 중심 멤버였던 강통원·박철희·고영기·김종원·문충성 등은 훗날 제주문단의 원로가 됐다.
양중해 시인은 "선생의 제주피란 시절 적막하기만 했던 제주사회는 일종의 문예부흥과 같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고, 그 중심은 칠성로였다"며 "(다방에서) 동인지가 나오고, 문학의 밤이 열리고, 문학감상의 자리가 마련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앞다투어 교지를 내면서 문예물을 실었다"고 말했다.
계용묵은 3년 5개월 가량 제주에 머물다 지난 1954년 6월 제주를 떠났다.
◇ 1950년대 다방문화의 르네상스기…유행 바뀌며 막 내려
「다방이 맹휴('동맹 휴업'의 줄인말)하자 그제까지도 온종일 거리로 흘러나오던 레코드 멜로디는 뚝 끊어지고 칠성통 거리는 설날 같은 적막을 느끼게 한다. … (중략) … 그러나 다방 레지들이 '뒷문은 열렸습니다' 하는 바람에 월수의 절반을 꼬박꼬박 차대로 바쳐가던 문화인들. 그래도 커피 냄새가 그리운지 텅 빈 홀을 독차지해서 레지들과 분절 없는 농을 해가면서 무료 서비스로 커피중독의 갈증을 푼다. 이러고 보면 (다방은) 문화인들에겐 제법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오아시스.」
1955년 3월 15일자 제주신보에 실린 '헤메이는 다방어족(茶房魚族)'이란 제목의 기사 일부다.
물고기가 물 없이 살 수 없듯이 다방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을 은유적으로 빗댄 제목으로 보인다.
다방에 죽치고 앉아 커피 마시는 사람을 통칭해 '다방어족'이라 하고 그들에게 다방이 '오아시스'와 같다고 할 정도로 당시 칠성로 일대 다방 붐이 일었다.
커피 맛에 갈증을 느끼듯 문화예술에 대한 갈증이 다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소비되는 '다방문화'로 확산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피난민들 사이에 전황 등 정보의 소통공간이던 다방이 시간이 흐를수록 휴식과 문화예술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저명한 작가와 도내외 문학동호인들이 시 낭송회, 전시회, 초청 강연회, 출판기념회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 '전축'과 '레코드판'이 귀했던 시절 음악을 듣기위해 젊은이들이 다방으로 몰려들었다.
제주도 문화원연합회가 펴낸 '일도1동 역사문화지'는 1950년대의 제주의 모습을 '다방문화의 르네상스기'라고 표현했다.
"(제주 4·3과 한국전쟁 등) 극도로 위축됐던 분위기를 벗어나 활기와 희망을 불러오고 싶었던 몸부림과 같았다"며 "피난민과 토박이 등 서로의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위안하며 카타르시스를 해소시키는 심리적 장소가 바로 '다방'"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1955년 3월 15일자 '헤메이는 다방어족' 기사에서 왜 다방이 동맹 휴업에 들어간 것일까.
기사를 보면 칠성로 일대 4개 다방이 13일부터 세금과중을 이유로 일제 휴업에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손님이 많아 꽤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세금을 못내겠다'며 휴업까지 한 배경은 당시 커피를 마시고도 값을 치르지 않은 '외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부상으로는 매출이 많았겠지만, 외상으로 인해 현금 회수율이 낮았던 탓이다.
피난민 중에는 외상값을 치르지 않고 고향으로 몰래 떠난 경우도 많았다.
결국 행정의 만류에도 동맹 휴업에 들어간 4개 다방은 '괘씸죄'(?)로 영업 허가 취소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뒤 은파다방과 동백다방은 신문에 신장개업 광고를 내고 각각 남궁다방과 은성다방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런데도 다방은 계속해서 불어났다.
길다방, 호수다방, 양지다방, 초원다방, 소라다방 등이 생겨나면서 1960년대 제주시내에만 41곳, 1970년대 90곳의 다방이 영업했다.
시간이 흐르며 유행도 변하듯 다방은 과거 문학다방의 모습은 사라지고 대학생들의 미팅 장소 또는 음악다방의 형태로 변모했다.
동인지가 나오고 문학인의 밤이 열리던 칠성통 거리도 '문학인의 거리'에서 '쇼핑의 거리'로 변했다.
제주문단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다방문화'도 이렇게 유행처럼 막을 내렸다.
b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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