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검찰·국정원도 칼 빼든 산업스파이…'기정학' 패권시대 유출방지 총력전
반도체·디스플레이·이차전지 등 핵심기술 탈취 증가…검찰·국정원 대응 강화
'영업비밀→경제간첩' 패러다임 전환…법원 양형기준 높여 최대 징역 18년 권고
(서울=연합뉴스) 노재현 황윤기 기자 = 중국이 최근 자국 반도체 업체에 근무하던 한국인 기술자를 간첩 혐의로 구속한 배경에 '반도체 전쟁'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중국 등 해외로 유출되는 기술 범죄가 빈발하고 있다.
최근 수년간 국가 핵심기술이 중국 등지로 빠져나간 사례가 적발되고 개별 범행의 심각성도 커지면서 대응에 비상이 걸렸다. 아울러 중국이 기술 빼돌리기에서 더 나아가 직접 인재를 억류하는 행동까지 보이면서 우리나라도 기술 유출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 세계적으로는 과학·기술 발전과 맞물려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한 데다 과거 정치·군사 위주의 전통적 안보 개념이 냉전 시기를 지나면서 변화해 '경제 안보'의 중요성이 커졌다.
지리적 위치에 따라 국제무대 힘의 균형이 이뤄진 지정학(地政學) 시기를 넘어 이제는 국제관계에서 경제 패권을 위해 기술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기정학(技政學) 시대로 접어들었다.
기술 유출은 단순한 국부 유출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제안보의 핵심 과제다.
우리나라 역시 기술 유출 방지에 힘을 쏟고 있지만 중요 기술의 해외 유출은 증가세다.
각국은 중요 기술과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 '경제간첩죄'를 신설하고 컨트롤타워를 설치하는 등 사활을 걸고 대응에 나섰다. 우리나라도 영업비밀 보호에 머물렀던 기존 부정경쟁방지법의 한계를 넘어 산업기술 유출방지 보호법, 방위산업기술 보호법, 대외무역법 등의 제·개정을 통해 기술 보호를 강화하고 국가 차원의 핵심기술을 지정하는 등 총력 대응 중이다.
사법적 측면에서 보면 주요 산업의 기술 유출은 범죄 구성요건이 모호하고 위법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데다 유출 수단이나 방법도 고도화돼 증거를 확보하고 혐의를 증명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검찰과 국가정보원은 기술 유출 범죄에 자체 대응 역량을 강화했고 법원도 양형기준을 손보는 등 정부 기관이 일제히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산업 스파이'를 잡기 위해 칼을 빼 들었다.
◇ 올해 산업기술 해외유출 19건…기소 건수도 증가세
국정원에 따르면 올해 1∼9월 적발된 산업기술의 해외 유출은 19건, 이 가운데 국가핵심기술 유출은 5건이다.
2019년부터 올해 9월까지 적발된 산업 기술의 해외 유출 사건은 115건으로 집계됐고 이 중 국가핵심기술이 37건으로 32.2%를 차지한다.
국가핵심기술은 반도체·자동차·이차전지 등 우리나라의 주력산업과 관련해 기술적·경제적 가치가 높아 해외로 유출되면 국가 안보와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기술이다.
유출된 기술 중에는 반도체가 44건으로 가장 많고 그다음으로 디스플레이 23건, 이차전지 7건, 자동차 10건, 조선 7건, 기계 7건 등의 순이다.
범행 수법도 아예 회사를 차리고 핵심 인력을 빼내거나 국내 기업을 사들여 기술을 탈취하는 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지난 9월 서울중앙지검은 국가핵심기술인 삼성전자의 D램 공정 기술을 부정 사용해 20나노 D램을 개발한 혐의로 중국 반도체 회사 '청두가오전' 대표와 개발실장을 구속기소했다.
청두가오전 대표는 삼성전자 상무와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부사장을 지내며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 30년을 근무한 인물이다.
작년 6월에는 삼성전자 임원 출신이 회사의 반도체 공장 설계 도면을 입수해 중국에 '복제 공장'을 세우려 한 사건이 적발돼 충격을 줬다.
대검에 따르면 검찰은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혐의로 18명을 구속기소, 25명을 불구속기소 했다. 약식명령과 기소유예까지 합치면 검찰이 혐의가 인정된다고 보고 처분한 피의자는 총 56명이다.
검찰이 관련자를 재판에 넘긴 기술 유출 사건은 2019년 10건, 2020년 13건, 2021·2022년 각 14건, 지난해 19건으로 계속 늘었고 올해는 반년 만에 15건을 기록했다.
◇ 검찰 "구속 수사 원칙"·국정원 "기술 보호에 전력"
정부는 기술 유출을 국내 산업 경쟁력을 악화하는 핵심 범죄로 간주해 대응을 강화하고 있다.
대검찰청은 2022년 9월 산하에 기술유출범죄 수사지원센터를 설치하고 서울중앙지검·수원지검·대전지검에 전담 수사 부서를 뒀다. 그밖에 일선 지방검찰청과 지청에도 전담 검사와 수사관이 배치돼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4월에는 '검찰 사건처리기준 개정안'을 마련하고 국가 핵심기술 유출 범죄 피의자를 원칙적으로 구속 수사하라고 일선에 지시했다.
국정원도 2022년 1월 산업기술안보국을 신설하고 기술 유출 범죄 예방에 나섰다. 최근 적발된 기술 유출 범죄 중 국정원의 첩보가 수사 실마리가 된 사건이 다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자원부, 국토교통부, 경찰청 등과 공조해 자율주행, 지능형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참여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보안 진단과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정부의 통합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지난해 11월 범정부 기술유출 합동 대응단을 출범시켰다.
대응단에는 국정원과 대검 외에도 법무부·산업통상자원부·외교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중소벤처기업부·경찰청·특허청·관세청 등이 참여한다.
지난달 17일 최상목 경제부총리 주재로 열린 제244차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는 '글로벌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술유출 대응 방안'이 핵심 안건으로 의결됐다.
특허청은 특허 빅데이터 분석으로 기술 유출을 포착해 방첩기관과 공유하고 즉각 수사로 연계하며 전문인력을 활용해 수사를 고도화할 계획이다.
◇ 대법원 양형기준 강화…국가핵심기술 유출 징역 18년 권고
그러나 정작 기술 유출 사범들이 재판에 넘겨지고 나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일이 많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실제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법원에서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죄로 유죄를 선고한 6건의 평균 형량은 10.67개월에 그쳤다.
지난 3월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이 같은 비판을 반영해 양형기준을 손질했다. 권고 형량이 일제히 상향되면서 처벌이 강화될 전망이다.
새 양형기준은 국가 핵심기술 등 국외 유출 범죄에 최대 징역 18년까지 선고하도록 권고한다.
일반적인 산업기술을 유출하는 범죄도 국외 유출은 기존 9년에서 15년으로, 국내 유출은 기존 6년에서 9년으로 최대 권고형량이 올랐다.
양형위는 선고 형량을 줄이는 요소인 '감경 인자'를 보다 엄격히 인정하도록 관련 기준을 정비하기도 했다.
양형기준은 일선 판사들이 판결할 때 참고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벗어나 판결하려면 판결문에 사유를 적어야 해서 합리적 이유 없이 양형기준을 위반할 수는 없다.
양형위는 당시 "기술 침해 범죄에 대한 엄정한 양형을 바라는 국민적 공감대를 반영해 법정형이 동일한 유사 범죄 군의 양형기준보다 규범적으로 상향된 형량 범위를 설정했다"고 밝혔다.
새 양형기준은 올해 7월 1일 이후 기소된 사건부터 적용되지만, 법원도 기술유출 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 무거운 형량을 선고하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수원지법은 삼성디스플레이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제조 관련 기술을 유출한 전직 연구원에게 지난 7월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하고 법정에서 구속했다.
수소연료전지 제조 기술을 중국에 유출한 혐의로 기소된 전 현대자동차 연구원도 지난 8월 1심에서 징역 5년과 3억원의 추징 명령을 선고받았다.
water@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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