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 열리는 제7회 창원조각비엔날레 «큰 사과가 소리없이» 전시 전경.
이번 비엔날레 참여 작가인 크리스 로는 창원을 ‘침묵의 도시’라 칭했다. 발을 내린 순간 시야와 소리로 전해오는 도시의 파동은 잔잔한 곡률을 그린다. 커다란 산업단지가 곳곳에 자리하지만 포악하게 덩치가 크지 않고 사이사이 호수와 낮은 산등성이가 맞물려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을 이룬다. 올해로 7회째 열리는 우리나라 유일의 조각 비엔날레이지만 이제야 비로소 침묵을 깨고 적극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 또한. 이쯤에서 창원과 조각 사이에 어떤 맺음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창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추상조각가 김종영과 문신의 출신지다. 2010년 문신국제조각 심포지엄을 모태로 2년 후부터 비엔날레로 개최되어왔다. 올해는 사상 첫 여성 감독인 현시원 예술감독의 선임으로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특질을 갖게 되었다.
“내 자전거 바퀴는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인 ‘큰 사과가 소리없이’는 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의 구절을 차용했다. 창원은 큰 사과다. 껍질이 깎이는 과정은 조각이라는 행위와 맞물리고 나선 형태로 깎인 껍질은 도시 속에 길을 낸다. 이 길을 따라 곳곳에 놓인 조각은 도시의 역사와 변화, 여성과 노동까지도 조명한다.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제2전시관에 설치된 작가 문신과 크리스 로의 작품.
가장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는 건 역대 주 전시관을 맡아온 성산아트홀. 건물로 진입하기도 전에 시트지로 장식된 유리창이 관람객을 맞는다. 홍승혜 작가가 영화 〈모던 타임즈〉의 대표적인 이미지인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고 찰리 채플린이 낙하하는 장면을 드로잉으로 바꿔 새로운 장소에 이식했다. 산업 도시 창원의 정체성을 각인한 채 관람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하 1층과 지상 2층 총 3개층 8개의 전시관은 조각의 무궁무진한 변주를 보여준다.
1전시실은 성산아트홀의 뷔페 공간이었던 곳을 활용한다. 도시의 안팎을 살피고 경계를 허문다는 이번 비엔날레의 취지를 대변하는 공간이다. 아시아 건물의 내부에 관심을 갖고 작업하는 대만 타이베이 출신의 작가 루오 저쉰은 공간 전체를 재료 삼아 생경한 경험을 선사한다. 천장을 뜯어 건물의 속살을 드러내게 하며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호기심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영역에 손을 뻗친다. 전시실로 바뀐 식자재 창고, 조금씩 남겨둔 뷔페홀의 장식이 조각처럼 느껴지는 공간은 작품만큼이나 흥미롭다.
조각은 남성적이라는 인식을 덜어내고자 한 현시원 감독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긴 3전시실은 우리나라 1세대 여성 조각가들의 작품을 지금으로 불러 세운다. 1917년생인 김정숙 조각가는 최초로 철용접 조각을 시도했다. 김종영 작가와 초기 추상조각을 이끌었던 이 작가의 작품이 창원에 자리하는 건 지극히 필연적이다. 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하던 1950년대에 제작한 〈K양〉과 1990년대 전성기 시절 날아오르는 새와 여성의 신체 상으로 생명력과 여성의 몸에 대한 존중을 담은 작품 〈비상〉이 대구를 이룬다. 문신미술상 최초 여성 수상자인 김정혜 작가의 작품은 당대의 조각가들이 가졌던 전통적인 미적 형식과 조각의 근원적인 흐름을 탁월하게 투영해낸다. 대리석을 3백 번, 브론즈를 1천 번 사포로 문지른 곡선이 조각의 아름다움을 즉각적으로 전달한다.
소리와 영상이 조각의 범주 안으로 어떻게 입성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전시실 하나를 거의 채운 넓은 좌대 위에 형형색색의 종이 놓여 있다. 일본 작가 온다 아키는 16년 동안 모은 유리 종과 도자 종 사이를 유유히 걷다가 손이 가는 대로 집어 들어 소리를 낸다. 소리를 바탕으로 기억을 소환하는 의식이다. 퍼포먼스가 없을 때 종 무더기는 조각으로 남는다. 남화연 작가의 〈과도한 열정〉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끊임없이 과일을 쪼개 먹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살아가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행위는 다음을 위해 도약하고 에너지를 형성하는 순환의 과정이다. 작가는 조각 역시 손으로 무던히 깎고 다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거친다는 데서 공통점을 찾았다. 영상에서 과일을 섭취한 후 나오는 부산물은 성산패총의 조개무덤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비엔날레는 전시가 펼쳐지는 창원, 마산, 진해의 풍경을 단지 배경으로 놓지 않고 장소성을 부여한다. 1973년 발견된 조개무덤인 사적 제240호 성산패총, 과거 산업단지 근로자들의 활동 장소였던 동남운동장, 조각가 문신이 직접 일궈낸 문신미술관까지 세 곳을 더했다. 성산패총에서의 경험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가장 먼저 철을 만들던 작업장인 야철지를 거친다. 오래전 철을 만들던 공간은 역시 조각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의 흔적을 감상하는 공간에 현대의 작품을 놓아두어 시공을 중첩한다. 정소영 작가의 영상과 예민한 사운드가 흐르고 감상을 위한 벤치마저도 조각작품이다. 둔덕을 지나 다음 전시 장소로 가는 야외 잔디에도 조각이 서 있다. 필리핀 작가 미카엘라 베네딕토는 건축가적 면모를 영민하게 조각에 덧씌웠다. 반사되는 구조를 통해 성산패총 사방의 풍경을 담는다. 종착지인 유물전시관 발코니에는 최고은 작가의 〈에어록〉이 자리한다. 지붕을 지지하는 여러 개의 기둥에 스프링 형태의 조각을 둘렀다. 작가는 이 작업을 하기 위해 3개월간 창원에 머물며 매일 한없이 풍경을 바라봤다고. 한 조각가의 오랜 성찰로 익숙한 풍경은 새로운 인상을 입었다.
동남운동장은 1980년대에 새마을회관, 이후 근로자들이 운동회를 여는 터였다가 특별한 기능을 하지 않는 공간으로 남아 있던 곳이다. 얼마 후면 사라질 장소는 창원조각비엔날레로 인해 또 하나의 기억을 저장했다. 멀리에서도 보이는 검은 형체는 정현 작가의 〈목전주〉.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에 전시된 작품으로 12m나 되는 목전주에 콜타르를 바른 위용 넘치는 작품이다. 시멘트 전신주를 사용하기 전에는 흔하던 목전주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고 작가는 한국전력공사에 직접 연락해 전국에 수배를 내렸다. 온전한 형태를 가진 마지막 목전주는 창원 변전소에서 발견되었고 작품으로 탄생해 서울 전시를 거쳐 마침내 다시 창원에 자리하게 되었다.
마지막 장소는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작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여러 전시로 인해 다시 한 번 미술계에 회자된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이 스스로 세운 미술관이며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원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조각비엔날레를 위한 작품은 하나로 사방에 문신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의 정 중앙에 닻을 내렸다. 앞서 언급한 미국 작가 크리스 로는 창원의 이미지를 그대로 작품 〈반복되는, 예언적인, 잠들지 않는 졸린 도시의 루시드 드림〉에 옮겼다. 전시장의 빈 공간과 대화를 나누며 침묵이라고 느껴질 만큼 하얀 도시의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쌓아갔다. 선과 선을 이어 구조를 만들었고 도시를 탐방하듯 그 사이사이를 관람객이 다니는 꿈을 꾸었다.
작품 수가 총 1백77점으로 다른 비엔날레에 비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현시원 감독의 말처럼 도시 전체를 하나의 조각으로 연마해 ‘조각적 풍경’을 유람하게 한다. “결국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굉장히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얘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창원이라는 도시를 어떻게 색다르게 볼까 작가들과 얘기하면서 여행가방을 들고 도시 곳곳을 이동하는 것이 이번 비엔날레의 핵심적인 주제라고 생각했고요. 네 곳의 공간을 걸을 때마다 보게 되는 숲의 풍경이나 도시의 모습을 눈여겨봐주시길 바라겠습니다.”
※ 제7회 창원조각비엔날레 «큰 사과가 소리없이»는 성산아트홀, 성산패총, 창원복합문화센터 동남운동장,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 11월 10일까지 열린다.
박의령은 컨트리뷰팅 에디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창원 땅을 밟았고 한계 없는 조각의 방대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