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금철 대표는 씩~ 웃기만 했다. 그는 김일영 사장에게 평양을 방문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그러나 김일영 사장은 “왕회장과 같이 가는 방문이 아니면 안가겠다”고 잘라 말했다. 이상하게도 북측은 김일영 사장을 접촉하면서 돈을 달라는 요구는 일체 하지 않았다. 북측 인사들은 원래 자존심이 강해 경제 사정이 어렵다는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북측의 경제 사정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태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1997년 12월.
그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인민의 생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처음 꺼내기 시작했다. 김일영 사장에게도 이같은 호소를 했다. 또 전금철 대표의 예언대로 김대중 대통령은 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대선에 다시 나와 승리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물러나고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대북사업 분위기가 다시 무르익 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회장은 환호했다.
그가 자서전에서 혼잣말처럼 했던 ‘그 봄 날’ 이 다시 찾아 온 셈이다.
한편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평화통일이 ‘필생의 염원’ 이었다. 그는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을 들고 나왔다. 왕회장과 김대중 대통령은 똑같이 북한이 개인적 최대 관심사였다. 왕회장은 ‘필생의 사업’ 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필생의 염원’ 으로 북한을 바라봤다.
결국 두 사람은 대북사업의 최대 경쟁자 관계였다. 분명 대통령과 사업가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왕회장 은 ‘대한민국에서 누가 노벨평화상을 사상 처음으로 거머쥐느냐’ 하는 경쟁자 관계로 봐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1997년 말부터 이미 대북사업은 물밑접촉이 봇물을 이뤘다. 하지만 김일영 사장은 외환위기를 맞아 회사일 때문에 바빴다. 대북사업에 적극 나서지 못할 처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왕자헌 회장과 왕자구 회장은 대북사업에 본격 나섰다. 왕회장의 대북사업 야망을 아들들이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왕자형제는 대북사업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물밑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큐소설 왕자의난28]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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