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서 온 힝 세이아(32) 씨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영상 통화를 한다.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든 채 왼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힝 씨는 오른손잡이지만 가족들과 통화할 때만큼은 왼손으로 인사한다. 가족들에게 오른손을 들키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힝 씨의 손가락은 아홉 개다. 왼손 다섯 개, 오른손 네 개. 오른손 검지가 없다. 지난 2022년 11월 29일 광택기(폴리싱 기계)에 손가락을 잃었다. 비자가 만료돼 고국으로 돌아간 다른 이주노동자를 대신해 그날 처음 기계를 다루다 사고가 났다.
"제가 각파이프(스테인리스 사각관) 만드는데, 폴리싱 기계 사람 없어 가지고 하루 대신하고 일하다가 다쳤어요. 지금은 괜찮았는데(괜찮아졌는데), 근데 마음 많이 속상해요. 나라에 (있는) 가족에(게) 아직 이야기 안 했어요."
힝 씨는 내년 봄 '가족이 있는 나라'에 잠시 갔다 올 생각이다. 그는 가족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 의수 손가락을 준비하고 있다.
"부모님은(에게) 제가 '손가락 하나 사라졌어요'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요(모르겠어요). 말하는 방법 몰라요. (그래도) 의수 손가락 있으면 (가족들 마음이) 조금 아파요. 부모님은 제가 (한국에 오기 전에는) 괜찮았는데 (사고가 있었다는 걸 알면) 걱정이에요(걱정할 거예요). (손가락 없이) 가면 갑자기 너무 아파요."
아직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세 살배기 딸아이에게 손가락 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아빠 힝 씨를 지난달 9일 경기도 김포의 '이주노동자센터 이웃살이'에서 만났다.
이웃살이는 천주교 예수회가 김포 지역 이주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 2004년 설립한 곳으, 비자 문제·임금 체불·산업재해 및 보상과 같은 노동 상담 외에도 일자리를 잃거나 옮기는 이들에게 임시 거처를 제공하고 있다.
"기계 들어가서 검지 다 날아가 버렸어요"
"보통 손가락 다섯 개 있잖아요? 그런데 볼 때마다… 일어나서 제가 처음 이거(손) 봐요. 손가락 없어요. 너무… 저는 (손가락이) 보고 싶어서 그런데 안 돼요(안 보여요). 그런데(손가락이 없는 걸 보고 나면) 또 (마음이) 아프고(아파요). 그런데 또 어쩔 수 없어요."
힝 씨는 1년 11개월이 지난 지금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손부터 확인한다. 없어진 손가락을 보고 싶은 마음에 손부터 펼쳐보지만 막상 보면 없고,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아프고…. 가족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다 보면 또 어쩔 수 없어서, 더 아프고….
힝 씨는 그러나 그날에 대해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웃으면서 이야기해야 그나마 덜 슬프다는 듯.
"갑자기 손가락이 기계(에) 들어가서 피부 나가고(벗겨지고) 그 다음에 뼈만 있어요. 뼈만 남았어요, 하얀 뼈.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휘어 보이며) 그것도 이렇게. 장갑 끼고 있었는데 얘 것만(검지만) 다(장갑이랑 피부랑) 날아가 버렸어요. 얘 손(검지) 빼고 다 장갑 있잖아요(있었어요)."
힝 씨는 순간적으로 "지금 위험 있어요. 도와주세요"라고 외쳤고, 외침을 듣고 달려온 동료들에게 "병원 가고 싶다"고 소리를 질렀다. 회사 쪽도 다급하게 움직였다. 119에 신고했지만 퇴근 무렵이라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말에, 공장장과 차장이 그를 차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다.
30분을 달려 병원에 도착했지만 의사를 만나기까지 30분을 더 기다렸다. 오른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었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고 목장갑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뼈만 남은 검지만 하얬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있었다. 보통 사람들처럼.
의사는 엑스레이(X-ray)를 찍더니 검지 두 마디가 깨졌다며 임시로 봉합한 뒤 일주일 정도 상황을 보자고 했다. 힝 씨는 손가락에 붕대를 감은 채 입원해 있던 그 일주일에 대해 "답답했고, 눈물이 내리고, 생각이 많았다"고 했다.
일주일 후 의사는 깨진 두 마디에 염증이 생겼다며 남은 한 마디도 절단하는 게 좋겠다고 했고, 수술이 곧바로 이뤄졌다. 결국 힝 씨의 오른손은 '보통 손가락 다섯 개'가 아닌 네 개뿐인 손이 됐다. 그는 수술 통보를 받은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듯 "다른 방법 없어 가지고 그래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수술 후 문제는 네 개밖에 없는 손가락에 적응하는 일이었다. 재활치료가 이어졌지만, 보이지 않는 손가락에서 환상지통(존재하지 않는 사지에서 느끼는 통증)이 계속됐고 엄지와 중지에 의지해 물건을 집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컵 하나를 잡으려고 해도 손가락이 네 개뿐인 오른손으로는 어려웠다. 종이컵은 들어도 유리컵은 못 들었다. 연필도 포크도 오른손으로는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검지를 뻗어 어딘가를 가리켜도 봤지만, 검지는 없었다.
"이주노동자를 '땜빵' 인력 취급"
힝 씨는 수술한 병원에서 넉 달간 입원 치료를 받다 회사에 복귀했다. 회사에 복귀할 즈음에는 병원도 옮겼다. 보다 전문적인 재활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회사의 산재 처리로 힝 씨의 수술 및 치료 전 과정은 근로복지공단의 요양 급여로 진행됐다.
힝 씨를 옆에서 지켜보며 도움을 준 이웃살이 센터장 안정호 신부는 "힝 씨가 검지 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하다 보니 중지에 힘이 많이 들어가서 손가락과 손등, 팔목 등 연속적인 통증에 시달렸다"며 "재활치료 몇 달로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힝 씨의 진료 카드를 보면, 힝 씨는 병원 퇴원 후 6개월간 주 1회 재활치료를 받았다. 평일 오후 반차를 사용해 병원을 오고 가기도 하고, 주말을 이용해 병원을 찾기도 했다. 안 신부가 힝 씨의 병원 예약과 진행 상황을 일일이 확인했다. 힝 씨가 잔업 등으로 치료를 못 받게 되는 날이면, 안 신부는 힝 씨를 대신해 치료 날짜를 변경하는 등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게 힝 씨는 수술 후 9개월여 만에 "손가락으로 물건을 집는 기능은 큰 문제가 없는" 단계로 상태가 호전됐다.
안 신부는 힝 씨의 재활치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근로복지공단에 장해 등급 신청을 서둘렀다. 회사가 이미 산재 처리를 했기 때문에 근로복지공단에서 요구하는 서류(장해진단서, 방사선 검사 자료, 진료기록부 등 장해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하면 등급을 받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힝 씨는 지난 2월 손가락 절단으로 인한 '결손 장해, 제1 수지 관절 이상을 잃은 사람'으로 분류돼 공단으로부터 '장해 등급 10급'을 받았으며, 이에 따른 장해 급여도 수령했다.
안 신부는 "폴리싱은 힝 씨의 일이 아니었다. 폴리싱 기계는 숙련 노동자에게도 위험한 일인데, 회사는 위험성을 알면서도 미숙련 노동자에게 일을 맡겼다. 명백한 회사 측의 잘못"이라며 "제조업 현장일수록 전문성을 요하는 일이 늘고 있지만, '오늘은 저거 해, 이거 해'라며 이주노동자들을 '땜빵(빈자리를 대신하는 사람)' 인력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웃살이에서 노동상담을 하고 있는 김주찬 신부는 "힝 씨처럼 기계에 손가락이 잘리거나 절단돼 이웃살이를 찾아오는 경우가 1년에 2~3건이 된다"며 "대부분 프레스 기계에서 일어나는 사고로 방호장치(센서) 설치가 의무(산업안전보건법 제33조)지만 센서 감지로 작업 속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설치를 하고도 작동시키지 않아 사고가 발생한다"고 했다.
"이주노동자 산재, 그저 '운'에 맡겨진 일"
고용허가제(E-9 비자)를 통해 들어온 이주노동자 대부분이 내국인이 기피하거나 위험률이 높은 업무로 배치된다. 통계청의 '이민자 체류실태 및 고용조사'(2023년 기준)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는 전체 취업자의 3% 수준이지만 취업자 중 45%가 제조업에 종사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이주노동자 산업안전보건 현황과 정책과제'(2020년 기준) 보고서를 보면, 이주노동자의 '사고재해율'은 0.87%로 내·외국인 전체 노동자(0.49%)보다 높다.
힝 씨가 지난 2013년 9월 한국에 처음 와 일한 곳도 최저임금 수준에, 위험률마저 높은 일자리였다. 당시 그의 월급은 103만 원으로 수당을 합친 한 해 벌이는 2000~2200만 원 수준이었다. 2013년 기준 최저임금은 시간당 4860원으로 월급으로는 101만5740원이다.
"처음에 창문 샤시(아파트 베란다 창문), 그거요. 창문 공장에서 일했어요. 6년 정도. 그거 나는 제가 몸이 아파 가지고 디스크 있어요(생겼어요). 허리 디스크요. 거기서 우리 물건 많이 들었어요. 창문에 유리 붙여요. 그 다음에 들어 팔레트 위에 넣어요(쌓아요).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매일매일, 일요일도. 한 달에 하루만 쉬었어요."
힝 씨는 6년을 한 달에 하루만 쉬며 일했다. 그 결과 20대 건장한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숨쉬기가 어려웠고 기침을 하면 피가 섞여 나왔다. 스스로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창문 공장을 그만뒀다.
힝 씨가 짐 가방을 들고 이웃살이를 찾은 게 바로 이때였다. 그는 1년 반가량을 이웃살이에 머물며 호흡기 내과, 정형외과, 치과 등 병원을 들락거렸다. 림프절 비대 소견과 림프 암 의심 진단으로 추적 관찰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백혈구 수치도 낮았다. 허리뿐 아니라 목 디스크 조직도 파열돼 흘러내렸다. 이 또한 사실상 '산재'였지만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한 업무와의 연관성을 입증하기가 어려웠다.
이주노동자의 비자 문제 및 산재 신청에 대한 법률 지원을 해온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프레시안>과 전화 통화에서 "이주노동자 대부분이 내국인이 꺼리는, 위험 상황이 높은 일에 배치된다"며 "산재 사고 원인을 분석해 보면, 사용자들은 이주노동자의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제대로 된 교육 없이 일하다 발생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주노동자가 산재를 피하는 것은 그저 운에 맡겨져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했다.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지 않다"
힝 씨는 금속 공장에 취직한 지 6개월 만에 오른손 검지를 잃었지만, 여전히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각파이프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나간다.
"(사고 난 곳은) 저 일하는 자리 아닙니다. 제가 처음 왔을 때 (창문 공장에서) 6년 동안 (일하면서) 한국어 못 배워요(배웠어요). 계속 일하고 일해요(일했어요). 한국 말 너무 부족해요. 첨(첫) 회사는 일이 너무 바빠서 한국어 공부하고 싶어도 (배우러) 못 가요(갔어요). 그런데 지금 회사는 토요일에도 주말에도 일 안 하면 한국어 수업할 수 있어요(들으러 갈 수 있어요). 계속 공부했어요."
그는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한국에서 조금 더 일하고 싶어서 직접 회사에 비자 전환을 요청했다.
"E-9 비자 체류 기간 얼마나 없어 가지고 (회사에) 요청해요(요청했어요). '비자 변경하고 싶어요'라고. 처음에 공장장님하고 차장님 하고(한테 말하고), 다음에 이사님(에게) 말했어요. E-9 비자 (만료) 한 달 남(기)고 신청했어요."
4년 이상 E-9(고용허가제), H-2(특례고용허가제) 등의 자격으로 합법적 취업 활동 중인 외국인 중 숙련성 등이 검증된 자에 한해 E-7-4 전환이 가능하다. 연봉 2600만 원 이상 2년 이상 취업 보장을 내용으로 하는 고용 계약서와 평균 소득 및 한국어 능력과 같은 기본 항목 점수가 200점 이상이어야 한다. 이 같은 조건은 E-7-4 비자를 연장할 때도 유지되어야 한다.
E-7-4가 이주노동자들에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E-9 비자는 고용노동부 고용지원센터의 관리를 받지만, E-7-4 비자는 기존 회사와의 고용 계약뿐 아니라 이직 등 취업 알선을 직접 해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은 E-7-4 조건인 연봉 유지 및 취업 기간 보장 등을 충족하는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고들 한다. 숙련기능인력으로 인정을 받아도 이들을 전문가로 대해주는 사업장이 많지 않다는 의미다.
힝 씨는 비자 연장을 위해 고국에 돌아갔던 기간을 제외하면, 꼬박 10년을 한국에서 생활했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캄보디아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손가락 하나가 사라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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