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박종근 대표는 이 자리에서 “초청장을 주겠으니 누가 올 것인 지를 써 달라”고 했다.
김일영 사장은 한국에 연락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생각대로 방북자 명단을 써줬다. 왕회장이 첫 방북 할 때 함께 갔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 적었다. 왕회장, 박재면 휸다이중공업 사장, 간신규 사장(당시 휸다이건설 전무), 이규병 화문일보 사장(당시 비서), 이흔내 휸다이 건설 사장, 심영현 종합기획실 사장 등 총 10명을 적어줬다.
북한의 박종근 대표는 다음날 초청장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김영일 사장은 흥분해서 서둘러 귀국했다. 왕회장은 김일영 사장이 돌아온다는 보고를 받고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는 등 기대가 컸다.
김일영 사장은 북측의 초청장을 왕회장에게 건 네면서 분위기를 전했다. 왕회장은 수고했다는 말만 했다. 며칠 뒤 왕회장은 김일영 사장을 다시 불렀다. 그는 겸연쩍 어하면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김사장, 북한 갈 때 우리 식구들 좀 같이 데려갈 수는 없을까?”
아들인 왕자헌 회장, 왕자구 회장, 부인인 변석중 여사, 형제인 영인, 영세명예회장, 동서인 김주영 국한프랜지 회장이 갈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실 그에겐 고향을 가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대선 패배 이후 심신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일영 사장은 다시 베이징으로 가 북한의 박종근 대표를 만났다. 초청장에 적힌 방문자 이름을 바꿔 달라는 김일영 사장의 요구에 뜻밖에도 그는 거부감 없이 쉽게 고쳐줬다.
왕회장의 재방북은 이렇게추진됐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의 청와대가 걸림돌로 문제였다. 북측의 초청장을 제시하며 방북 허가를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기 때문이다. 휸다이그룹은 당시 계열사가 세무조사를 받고, 일부 금융권의 대출이 끊기는 등 김영삼 정부의 압박을 받고 있을 때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청와대의 허락이 떨어질 리 만무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대북 접촉 방식은 ‘내가 맨 먼저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누가 됐건 먼저 가서 길을 닦아 놔라, 그러면 내가 간다’는 식 이었다.
왕회장은 김영삼 대통령을 원망하며 쓰린 가슴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대선 패배자의 아픔이었다. 하지만 김일영 사장은 베이징에서 북한 측과 접촉을 계속했다. 북한 측은 그 동안 베이징의 대남 조직 이름과 담당자를 수 차례 바꿨다. 대화 상대도 박종근 대표에서 전금철 대표(조국평 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 대외경제협력 추진위원회 고문)로 바꿨다.
하루는 김일영 사장이 전금철 대표를 만났다. 놀랍게도 그는 한국의 모든 신문을 읽고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속속들이 다 파악하고 있었다.
“김대중 선생이 정계 은퇴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하더라.”
“맞다.”
“내가 볼 때 김대중 선생은 다음 대통령 선거에 또 나올 거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설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대 국민 정계 은퇴 성명도 발표했는데.”
"나는 김대중 선생이 쓴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김대중 선생은 다음 선거에 반드시 다시 나올 것으로 분석된다. 두고 봐라.”
“그러면 내기를 하자. 100달러를 걸겠다.”
[다큐소설 왕자의난27]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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