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 수(가명*, 25)는 몇 달 만에 삶의 이토록 급격하게 뒤바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차우는 남편을 잃고 어린 자녀 셋과 남겨졌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남편은 징집돼 최전방으로 보내졌고, 목숨을 잃었다.
차우는 “우리는 항상 가난했고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남편이 있었기에 삶은 훨씬 견딜만했다”고 말했다.
2021년 미얀마를 장악한 군사 정권은 올해 2월, 의무 병역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18~35세 남성 및 18~27세 여성은 최대 2년간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해야 한다.
징병제 실시가 현재도 진행 중인 내전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와 시민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군정은 강경하게 밀어붙였고, 올해 4월 첫 징집병 훈련이 실시됐다.
그리고 3월, 차우의 남편은 다른 남성 마을 주민 2명과 함께 이들이 사는 마을의 첫 징집 대상이 됐다. 일부 남성은 도망쳤지만, 남편은 훈련소로 보내졌다.
그것이 차우가 본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021년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웅산 수 치 국가 고문의 정부를 무너뜨린 군부에 맞서 미얀마 곳곳에서 여러 단체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미얀마는 본격적인 내전으로 치닫게 됐다.
지난해의 경우 군부가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하며 국토의 최대 3분의 2가 저항군의 손에 넘어가는 등 전환점과도 같은 해였다.
동남아시아에 자리한 미얀마는 지난 수십 년간 군부 통치와 억압이 반복돼 왔으며, 소수민족 무장 단체와 새로운 저항 세력들은 군부를 더욱더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UN에 따르면 쿠데타 이후 최소 5만 명이 목숨을 잃고, 300만 명 이상이 피난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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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7월, 차우는 남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군부와 소수민족 무장 단체 간 전투가 가장 치열한 카렌주에 배치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남편은 자신이 2주간 최전방에 배치될 것이며, 기지로 돌아오면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습니다.”
차우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것이 내가 남편에게 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소식”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7월 말, 장교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저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장교가 말로 저를 위로하려고 했으나, 저는 제 인생은 이제 끝임을 알았습니다.”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의 급여를 약속받았으나, 차우는 남편이 처음 징집됐을 때 마을 지도부로부터 받은 7만짯(약 2만9000원)이 전부라고 했다. 이후로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재정적 지원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군 당국은 징집병도 정예 병사와 마찬가지로 복무 중 사망 시 급여와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조 민 툰 미얀마 군정 대변인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러나 필수 서류가 갖춰지지 않을 경우 지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얀마 전역에서 징집된 이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준비도, 지원도 없이 전투 지역으로 파견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의 가족은 남편과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곤 한다.
남편을 잃고 홀로 지내는 60대 여성인 소이 소이 아이의 아들도 6개월 전 징집됐다. 소이는 아들로부터 그 어떠한 소식도 듣지 못한 상태다.
소이에 따르면 아들은 군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으나, 가족들을 부양하려고 했다고 한다. 현재 소이의 건강이 좋지 않아 막내딸이 생계를 책임진다.
소이는 “아들을 보고 싶다. 이 상황을 감당할 힘이 없다”고 토로했다.
'군이 더 싫어졌습니다'
한편 여러 미얀마 청년들은 징병 명령에 저항하고자 여러 극단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미얀마의 상업 중심지인 양곤 출신의 칸 흐투 르윈(20)은 징집돼 다른 징집병 30명과 함께 3달간 훈련을 받았다.
“훈련 후 난 군이 더 싫어졌다”는 칸은 혹독한 훈련이었으며, 탈출할 경우 고향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협박도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던 중 잠시 멈춰 섰고, 그는 다른 청년 2명과 함께 탈출할 기회를 잡았다.
칸은 “우리는 날이 어두워지고 보안 검문으로 바쁠 때 서둘러 도망쳤다”면서 “해가 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다 너무 지쳐서 좀 쉬고자 멈춰 섰습니다. 교대로 잠을 자고 망을 봤습니다.”
새벽이 되고 세 청년은 지나가던 트럭 운전사의 차를 타고 남부 샨주의 아웅반 지역에 도착했다. 칸은 이곳에서 ‘시민 방위군(PDF)’에 합류하길 택했다. PDF는 군정에 맞서 조직된 민병대 네트워크다. 다른 2명은 다른 길을 택해 떠났다.
칸은 현재 자신은 숨어 있다면서, 안전상의 이유로 자신과 동료들이 현재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밝히길 거부했다.
군부에 환멸을 느낀 청년들이 무기를 들면서 PDF 및 다른 저항 단체는 커지고 있다.
태국으로 도망치는 청년들
주로 징병된 이들은 남성이지만, 여성들도 영향을 받고 있다.
양곤 출신의 20살 여성 주이 주이는 원래 중국어 통역사가 되길 꿈꿨으나 포기하고 PDF 내 부대인 ‘특수 작전 부대(SOF)’에 가입했다.
주이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제 내 목표는 군부 독재 시대를 끝내고 우리 세대를 위한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렇듯 고국에 남기로 한 사람도 있지만, 외국으로 떠나는 이들도 있다.
엔지니어로 일하던 28세 남성 민 민은 징병제 실시가 발표되자 태국으로 떠났다. 현재 교육 비자로 태국에 머물고 있는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릴 합법적인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민처럼 태국으로 도망간 많은 미얀마인들은 저임금 일자리를 맡게 된다. 태국 당국의 불법 이민자 단속도 더욱 엄격해져, 적발 시 강제 추방될 위기에 놓인 이들도 많다.
민 또한 자신의 비자가 만료돼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했다.
“생활비가 걱정돼 육체노동 일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지만, 태국 국민들이 우선 선발되고, 이들의 권리는 보호되는 반면 태국의 사업주들이 이주민들을 착취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민은 “불법으로 일하는 미얀마 출신 엔지니어들도 봤는데, 이들은 1만2000바트(약 48만원) 정도 받고 일한다”면서 “이는 이주 육체노동자들의 급여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한편 미얀마의 차우는 현재 마을의 잡일을 도우며 아이들을 겨우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간간히 벌고 있다. 차우는 “내가 겪는 이 어려움을 말로 설명하기란 어렵다”고 했다.
소이는 아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자 노력 중이다.
소이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은) 엄마인 저를 먹여 살리고자 입대했다”면서 “아들을 보낸 것이 후회된다”고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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