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지금까지 3인 체제로 운영해 왔던 소위원회를 4인 체제로 바꾸고, 위원 한 명만 반대하더라도 진정을 전원위에 회부시키지 않고 소위원회에서 자동 기각되도록 했다. 2001년 출범 후 줄곧 이어져 온 만장일치 표결 관행을 폐기한 것이다.
인권위는 지난 28일 제20차 전원위를 열고 '소위원회에서 의견 불일치 때의 처리' 안건을 표결에 부쳐 재적 인원 11명 중 찬성 6명, 반대 4명으로 통과시켰다. 인권위 전원위는 인권위법 제13조에 따라 재적 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소위원회에서 위원 한 명만 반대하더라도 진정을 전원위에 회부시키지 않고 자동 기각되도록 하는 이 안건은 지난해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 등 인권위원 6명 주도로 발의됐다. 찬성파들은 현재 인권위법이 소위에서 구성위원 3명 이상 출석 및 3명 이상의 찬성으로 안건을 의결하도록 하고 있어 진정 건수는 많지만 '가결도 부결도 아닌 상태'가 계속돼 진정 처리의 시급성을 확보하지 못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반대파들은 해당 안건이 통과될 시 합의제 기구인 인권위의 의사결정이 왜곡되거나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거세게 반대했다. 송두환 전 위원장은 이같은 우려에 따라 안건을 전원위에 상정하지 않아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 등과 갈등을 빚어왔다. 그러다 결국 지난 9월 취임한 안창호 현 위원장이 전날 안건을 표결에 부치면서 해당 안건이 통과됐다. 안 위원장은 이날 기권표를 던졌다.
표결을 앞두고 남규선 상임위원은 이날 회의에서 "인권위는 그간 소위원회에서 표결 없이도 서로 합의하기 위해 노력했고, 합의가 되지 않으면 안건을 재상정하거나 전원위에 보냈다"며 "지금까지 20만 건에 달하는 진정을 접수한 조직인 인권위가 이런 결정을 가볍게 내려도 되는 것인가"라고 항의했다.
반면 이충상 상임위원은 "인류는 그간 천동설을 믿어왔지만 아이작 뉴턴이 지동설을 입증해 뉴턴 이후로는 지동설에 의문을 갖는 인간이 없다"며 "이 안건에 대해 저는 뉴턴에 해당한다. 시간이 지나면 제 발언이 맞는 것으로 확립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을 포함한 정책자문위원 19명은 지난해 인권위 정책자문위원회 결의서를 통해 "모든 안건에 대해 3인 이상의 출석과 3인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해온 기존의 소위원회 운영 방식이 지켜져야 한다"며 "규정의 해석과 소위원회 운영은 합의정신의 존중과 민주주의 원칙 하에 진정인의 권리 보호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전원위에서는 현재 3인으로 운영되는 소위원회를 4인으로 구성하자는 내용의 안건도 통과됐다. 다만 4인 체제 소위에서 찬성과 반대가 2대 2 동수가 될 경우에는 소위 안건을 전원위에 회부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한편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 등과 대치해 왔던 박진 인권위 사무총장은 이날 퇴임했다. 박 사무총장은 이날 인권위 전원회의실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2022년 취임하며 '인권위에 가면 인권이 있다'는 말을 듣도록 하겠다고 약속드렸는데, 결론적으로 실패했다"며 "지난 8월부터는 거듭 고행의 나날이었다"고 토로했다.
박 사무총장은 "권고율은 최저 수치고 합의 정신으로 토론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결정은 수시로 뒤집히고 있다"며 "상임위는 몇 달째 열리지 않고 소위원회와 전원위원회는 정지 상태로 안건을 상정하지 않고 공회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직원들이 아파하고 모욕당하고 실망했다. 제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면서도 "자신을 향한 비판 앞에서도 조직과 인권 옹호만을 앞세워달라"고 당부했다.
박 사무총장은 앞서 지난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 나는 퇴장한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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