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이토는 고종을 배알하면서 일왕의 친서를 내밀었다. 친서의 내용은 안하무인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협박이었다.
‘짐이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별히 파견하니 대사의 지휘를 따르시오.’
5일 후에 이토는 궁궐 주위에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서게 하고 어전회의를 하는 궁궐 안까지 헌병과 경찰이 마음대로 드나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주한 일 군 사령관 하세가와와 함께 고종을 배알하며 한일협약안을 들이밀었다.
“천황께서 이 한일협약안을 수락하여 조인하기를 원하십니다.”
“너무나 엄중한 사안이라 어전회의에서 논의하도록 하겠소.”
“시간이 없습니다.”
“알겠소.”
한일협약안은 조정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며칠이 지나도 해결이 나지 않자 헌 병들과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어전회의장으로 들어간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게 하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약체결에 관한 찬성과 반대를 물었다. 이날 회의에는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고,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찬성 의사를 던졌다. 격분한 한규설은 회의의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 고종에 게 달려갔으나 헌병의 저지를 받았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5명의 대신(을사오적)과 다시 회의를 열어 조 약의 승인을 받아 내었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갔고, 미국, 영국, 청국, 독일 등 주 한 공사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듬해인 1906년 2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까지 장악하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일제는 토지, 인력, 곡물 등 한국을 마음 껏 수탈하였다. 고종은 조약이 불법 체결된 지 4일 뒤인 22일 미국에 체재 중인 황실 고문 헐버트 (Hulburt)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 정부에 전달해 주고 만방에 선포하라고 하였다.
이 사실이 세계 각국에 알려지면서 이듬해 1월 13일 런던타임즈가 이토의 협박과 강압으로 조약이 체결된 사정을 상세히 보도하였으나 조선은 별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1907년 6월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특사를 파견한 사실을 안 일본은 7월 20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순종을 즉위하게 하였다.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권 마저 완전히 장악하였고 곧바로 한국 식민지화의 최대 장애였던 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단행하였다.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어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상당수의 의병 과 항일 민족 운동가들은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망명하게 되었다.
[팩션소설'블러핑'28]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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