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첫인상이 차갑다는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일부러 막 웃고 다녔더니 마냥 해맑은 아이인 줄 아는 분들도 계시고.(웃음) 예고 시절엔 선생님들이 차가운 이미지로 봐주셔서 악역에 많이 캐스팅되곤 했어요. 선과 악 모두 표현할 수 있는 달란트를 지녔다고 생각합니다.(웃음)
드라마 〈정년이〉의 원작 팬인데, 배우 신예은이 ‘허영서’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김태리 배우가 맡은 ‘윤정년’의 라이벌로, 엘리트 코스만 걸어온 성실한 수재죠.
처음 제작진이 대본을 주셨을 때 영서라는 인물에 딱 꽂혔어요. 제 FM적인 성격, 완벽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닮아 있었거든요.
허영서처럼 정석대로 연기 교육을 받았죠. 안양예고 연극영화과,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를 다니며 10대부터 연기를 공부했어요. 그 시절은 어땠어요?
승부와 경쟁이 당연한 시절이었어요. 같은 꿈을 가진 친구들이 모여 점수를 받아 순위와 등급이 매겨지고, 캐스팅 경쟁도 치열했죠. 하지만 그게 혹독하거나 힘들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나 이거 할 거야, 해내야지’라는 마음 하나로 달렸죠. 그 시절 저는 갈증이 컸고, 남들에게 흠을 보이는 것도, 뒤처지는 것도 싫어서 정말 열심히 하던 아이였어요. 〈정년이〉를 찍으면서 제가 영서를 제대로 연기해내고 있는 걸까 고민이 될 때도 있었는데, 합을 맞춘 ‘홍주란’ 역의 우다비 배우가 저랑 같이 안양예고를 다닌 후배거든요? 그 친구가 제 연기를 보면서 “언니 10대 때의 모습과 비슷해요”라고 해줘서 의심이 확신이 될 수 있었죠. 영서를 연기하면서 그때의 마음을 되살릴 수 있어서 뿌듯했어요.
극 중 영서의 파트너 역할로 나오는 주란이 역의 우다비 배우와의 관계도 매력적인데, 드라마에서도 드러나나요?
그럼요. 드라마 속 국극을 선보일 때는 항상 붙어 있습니다. 같이 연기하다가 주란이가 등장하지 않는 신을 할 때면 엄청 보고 싶고 허전했어요.(웃음) 제가 3학년 때 다비는 1학년이어서 그렇게 친하진 않았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정말 친해져 같이 보자면서 축구 경기도 데려갔어요.
팬츠, 벨트 모두 Bottega Veneta. 셔츠, 타이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영서는 주로 국극의 남주인공을 맡는 캐릭터죠. 극중극에서는 제스처, 걸음걸이, 표정, 태도, 모든 걸 다 만들어나가야 했을 것 같아요. 어디서 실마리를 잡고 풀어나갔어요?
태리 언니랑 계속 얘기한 게, 제일 중요한 건 “연기는 기세다”라는 거예요. 내가 쭈뼛쭈뼛하고 부끄러워하면 남자답게 입어도 남자로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제 안에 기세가 있으면 의상이 갖춰져 있지 않아도 남자로 보여요. 그렇게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걸음걸이의 폭, 팔을 쓰는 넓이, 계란 하나를 품었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큰 자세 등 기본적인 것부터 만들어갔죠. 연습할 때도 왜소해 보이지 않으려고 펑퍼짐한 옷을 입고 다녔고, 판소리 연습으로 목이 상하자 그 허스키한 느낌을 이용해 발성을 했어요. 하다 보니 점점 남자 태와 목소리가 나더라고요. 처음엔 어색했지만 나중엔 국극 분장을 보면서 “오늘 구레나룻 좀 괜찮은데?” 하고 그랬죠.(웃음)
〈정년이〉에 극중극이 네 편이나 나온다고요. 한 편마다 실제로 국극 한 편을 다 완성하는 것처럼 런 스루(첫 신부터 마지막 신까지 리허설하는 것)를 했어요?
드라마상에서 어느 정도 편집돼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다 했어요.
너무 아까운데, 〈정년이〉 속 국극 공연 한번 올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그런 얘기 많이 나왔어요. 너무 아깝다고. 조단역분들과 다 같이 밤새 연습한 장면들 하나하나 다 보여드리고 싶은데 아쉬워요. 그리고 저희가 뒤로 갈수록 더 잘했거든요. 마지막 국극 찍을 땐 “처음 했던 국극도 다시 찍고 싶다”라는 얘기가 나올 만큼요.(웃음)
톱, 스커트, 부츠 모두 Dior.
실제 극단에 들어간 것처럼 함께 연습하며 끈끈해졌다고 들었어요.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또래가 많아서 특히 더 그랬어요. 같이 산속에 있는 펜션으로 워크숍도 가고, 춘향이 공부하러 남원에도 가고, 소리 연습한다고 폭포도 가고. 소리꾼 선생님들을 모셔서 훈련을 하기도 했죠.
극 중 김태리와 라이벌 구도인데 실제로 소리를 잘해야겠다는 압박감을 느끼기도 했나요?
그렇죠. 태리 언니가 이미 시작부터 너무 앞서 있었어요. 제가 소리를 한 달 배웠을 때 언니는 이미 2년 차였죠. 제가 계이름을 배울 때 언니는 체르니를 치고 있었던 셈이에요. 영서는 성골 중의 성골인 엘리트인데, 비교되면 안 되니 정말 책임감과 부담을 한껏 가지고 열심히 했어요. 관객분들, 아니 시청자분들(웃음)이 보시기에 어떨지 벌써 긴장되네요.
제가 보기엔 두 분 잘 맞을 것 같아요.
맞아요. 결은 좀 다르지만, 언니도 좀 평범하진 않아서.(웃음) 이젠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의지하고 응원하는 사이죠. 왜 잘됐는지 알겠고, 정말 존경하는 선배예요. 이제 다른 작품을 하거나 대본을 볼 때도 ‘언니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주 생각해요.
재킷 Ych. 스커트, 슈즈 모두 Ferragamo, 이너 톱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사람들은 신예은을 어떤 사람이라고 해요?
전 이상한 게, 가까운 사람들하고 있을수록 무뚝뚝해요. 제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데다 딱히 할 말도 없어서 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에요. 오히려 처음 보는 분들에겐 밝고 먼저 다가가서 얘기도 잘해요. 근데 그게 가식은 아녜요!
알겠어요. 사회적 자아가 강한 타입이군요.(웃음)
맞아요. 목소리부터 하이톤이 돼요.(웃음) 요즘 가장 신경 쓰려 하는 점 있어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요. 기분이 안 좋아도 그건 내 기분이고, 몸이 아파도 그건 내 몸이고, 일은 해야지. 그게 어른이지!
스스로 생각하기에 신예은은 어떤 사람이에요?
건전한 사람. 저는 또래들이 좋아하는 이슈 거리에도 딱히 흥미를 느끼지 않고, 유행에도 관심 없어요. 사람들이 뭘 한다고 해서 나도 그걸 해야겠다고 휩쓸리는 편도 아니고, 시끄러운 것도 싫어요. 그냥 집에서 혼자 청소하는 게 제일 재밌어요. 뭐랄까… 좀 보수적이에요. 금요일 밤에 ‘불금’ 대신 조용히 예배를 드리거나 혼자 시간을 보내죠.
슈트 재킷 YCH.
대신 혼자 할 수 있는 액티비티를 좋아하나 봐요. 마라톤, 사격, 스노보드, 축구 관람까지, 취미 부자던데요. 이를테면 ‘활발한 내향인’ 같은 걸까요?
맞아요. 혼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뭘 많이 해요. 대부분 지난 작품들에서 접하게 됐는데, 사격이나 마라톤은 기록을 깨는 스포츠라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화약 권총, 공기총 둘 다 해요. 스노보드는 오래 타서, 이젠 꼿꼿하게 서서 꽤 멋진 자세로 탑니다.(웃음)
혼자서도 잘 노는 신예은이 외로울 땐 없나요?
전 사실 외로움이 뭔지 모르겠어요. 외로움이 뭘까요? 가을 낙엽 떨어지면 느껴지는 감정?(웃음) 그런 기분이 들려고 하면 저는 그냥 차단시키는 것 같아요. 그러고 집을 청소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요리를 합니다. 딱히 저 자신을 보듬어주려고 하는 타입이 아녜요.
쿨하네요.
흠, 그러다가 또 “이잉 오늘 너무 슬퍼” 이래요.(웃음) 마냥 쿨하지만은 않은 게, 제가 꽤 예민한 사람이에요. 시각, 촉각, 후각 다 예민하고, 눈치도 엄청 빠르죠. 그런데 다 눈치챘는데 그냥 모른 척해요. 하하하.
요리는 뭐 잘하는데요?
청국장 찌개요. 파스타도 잘하고요.
대부분 혼자 해 먹나요?
같이 먹을까요? 다음에 놀러 오세요!
또 나왔다. 사회적 자아.(웃음)
하하하. 진심이었는데! ○○○번길 ○○○동….
코트 Dolce&Gabbana, 슈즈 Prada.
삶에서 이따금 넘기 어려운 언덕을 마주하거나 넘어지고 말 땐 어떻게 해요?
잘 넘어지고 잘 일어나요. 너무 안 넘어지는 것도 문제예요. 어깨만 ‘요따구’로 막 올라간다고요. 넘어져도 봐야 겸손해지는 거예요.
특유의 말투가 귀여워요. 사회화 엄청 잘된 내향인 같아요.
맞아요. 저 사회화된 거예요. 예고 다니면서 좋아하는 선생님들에게 예쁨받으려고 했던 게 습관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쌔앰~ 뭐 하세여~” 이러고 다녔거든요. 흐흐.
매란국극단 에이스가 되고 싶다는 영서의 야심처럼, 신예은은?
야심, 야심…. 야심! 저는 절 사랑해주는 분들이 많았음 좋겠어요. 제가 이런 작품 했어요, 저런 작품 했어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제 작품을 알아주는 분들이 많았으면. 그리고 제 팬분들을 한자리에서 많이 만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직 그 정도의 위치는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요.
팬들과 소통하는 ‘버블’이라는 SNS를 열심히 한다고 들었어요. 스스로를 언니로 칭한다던데.
하하하. 제 팬분들이 어린 편이기도 하고, 제가 어디 가서 언니였던 적이 별로 없어서 ‘언니미’를 보여주고 싶기도 해서요. 소중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구독해준 건데 열심히 해야죠! 그리고 소통하는 거 재미있어요.
블라우스 YCH. 팬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마음에 품은 말은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요. 모태 신앙인가요?
맞아요. 제가 건강할 수 있는 이유, 나아갈 힘이 거기에 있어요.
배우 신예은으로서 지금은 어떤 기점인 것 같나요?
전 연기를 가장 잘하는 사람은 연기를 처음 배우는 아이라고 생각해요. 겁이 없고 고민이 없거든요. 반면 가장 어려운 시기는 어느 정도 연기를 아는 상태죠. 어디서 들은 건 많고 배운 것도 많은데 내 생각대로도 하고 싶고 욕심도 나고 해내야 하고, 아주 복잡한 상태란 말이에요. 저는 그 시기를 조금은 지나온 기점에 서 있어요. 매 순간 후회 없이 연기했지만 평가는 제가 내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은 〈정년이〉라는 드라마를 다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종영 후에 저희 또 얘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