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이란 엔터테인먼트

'나락'이란 엔터테인먼트

코스모폴리탄 2024-10-28 09:57:53 신고

3줄요약
나락. 불교에서 지옥을 부르는 이름 중 하나다. 그러나 최근 우리가 익히 아는 나락은 〈피식대학〉이라는 유튜브 채널의 인기 코너 ‘나락퀴즈쇼’에서 정의했듯 “유명인이나 공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논쟁이 될 만한 행동이나 발언을 했을 때,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대중의 공격을 받고 지위나 직업을 박탈하려는 캠페인의 대상이 되는 현상”이다. 현재 나락은 온라인 공간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 중 하나다. 나락이 무서운 건 누구든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어느 누구도 나락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나락은 불시에 찾아와서 심각한 경제적·정서적 손상을 입히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위의 〈피식대학〉조차도 나락을 피하지 못했다. 더구나 나락 사태는 막아내기 어렵다. 왜냐하면 상대할 주체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당신을 나락으로 보내려는 힘에 저항하려는 시도는 실체가 없는 유령과의 싸움이다. 손에 잡히지도 않고 타격도 받지 않는 불특정 다수와의 싸움은 불가능하다. 나락 사태의 표적도 무력하게 지옥으로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나락 보내기의 기준이나 대상은 갈수록 다양하고 모호해진다.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밝혀진 범죄자가 나락으로 갈 때는 마땅한 대가일 수도 있겠으나, 이제는 나락의 화살촉이 어떤 이유로 누구에게 향할지 예상하기도 어려운 시국이다. 나락 보내기는 왜 이렇게 ‘콘텐츠’로서 흥행하는 걸까?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샤덴프로이데, 타인의 불행을 보았을 때 느끼는 기쁨을 뜻하는 독일어다. 영어에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지만 한국에는 있다. ‘쌤통’이 그것이다. 혹자는 잘나가던 누군가가 나락으로 갈 때 느끼는 감정을 여기서 찾는다. 그러니까 나락 보내기는 일종의 쾌감 추구 행위라는 얘기다. 일부에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단지 자신의 도파민 공급을 위해 나락 보내기를 즐긴다는 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그보다는 한국 사회의 가혹함이 나락 현상을 통해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한국 사회는 가혹한 경쟁 사회다. 조금 괜찮다 싶은 자리는 거의 예외 없이 높은 경쟁률로 피가 터진다. 남은 자리는 패자들에게 주어지는 처벌처럼 비루하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근소하다. 작은 티끌 하나 때문에 나는 올라서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서 스스로 잘나간다 나대는 유명인들을 보자면 부아가 치민다. 저들에게는 내게 없는 자격이 있을까? 따지고 보면 나와 그리 다를 것 없는데 왜 저들만 저렇게 잘나가는 건가? 그들은 처음에는 나락에 빠진 우리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성공해 높이 올라갈수록 비슷한 감정이 든다. 왜 저 사람만 저 높은 곳에 있지? 나의 지지로 높은 곳까지 올라간 저들도 티끌 하나로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어야 한다. 티끌을 잡았으면, 이제 내가 보내주었던 지지를 철회할 때다. 그게 ‘공정’한 세상이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한국의 나락 문화는 누구를 나락으로 보낸다기보다는 (내가 뒹구는) 나락으로 불러들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개그맨 이경규는 그래서 연예인의 롱런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절대로 잘나간다 자랑하지 마라. 자랑하려면 내가 얼마나 힘들고 아프고 어려운지 떠들어라.”

우리는 누구나 자기 효능감을 원한다. 내가 나 자신과 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온라인 유저들도 마찬가지다. 내 포스트에 붙은 ‘좋아요’ 개수는 그런 효능감의 확인 수단 중 하나다. 만약 내가 나와 생각이 비슷한 다른 이들과 합심해서 누군가를 끌어올리거나 끌어내릴 수 있다면, 그건 ‘좋아요’ 몇 개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효능감의 확인이다. 내가 세상을 바꾼 것이다. 누군가를 띄우기는 힘들어도 한순간에 나락으로 보내기는 쉽다. 그렇게 나락 보내기는 집단적 효능감 확인의 수단이 됐다. 문제는 나락의 기준이 점차 쪼개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제 보편을 떠나 각자의 윤리적 기준에 어긋나는 이들을 표적으로 지정하기 시작하고, 누구를 나락으로 보냈으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이도 보내야 한다는 논리까지 추가된다. 우리 진영이 당한 것처럼, 상대방도 똑같이 나락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 결과 나락 보내기는 이제 극단화된 진영 전쟁의 수단이 된다.

나락 보내기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이를 ‘캔슬 컬처’라고 부른다. 특정인 혹은 특정 주제에 대한 보이콧 문화는 예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21세기의 나락, 캔슬 컬처는 이전의 보이콧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세대 문화를 분석해온 사회학자 진 트웬지는 자신의 저서 〈제너레이션:세대란 무엇인가〉에서 나락 현상을 Z세대 특유의 문화로 본다. 시민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자유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다.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걸 어떻게 표현하든, 단지 생각과 표현만으로는 처벌은 물론이고 불이익을 주어서도 안 된다는 원칙이다. 그래야 시민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교류할 수 있으며, 그것이 건강한 시민사회의 기반이 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원칙이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온라인에서 논란을 일으키는 표현을 한 사람은 직위를 포기해야 할 뿐 아니라 아예 직장에서 쫒겨날 수도 있는 것이 지금의 미국 사회다. 왜일까? ‘표현의 자유’는 표현과 행동을 분리할 수 있던 세상에서나 통하는 가치다. 온라인 세상 이전까지 표현과 행동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생각과 표현은 계속 바뀔 수 있지만 행동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러니 생각과 표현은 자유롭게 하되, 행동만 선을 넘지 않으면 됐다. 그러나 온라인 공간은 다르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표현이 곧 행동이고 존재 자체다. 온라인에서는 내가 나를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거기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게다가 온라인에서 표현은 돌이킬 수 없다. 온라인에 올린 모든 표현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질 수 있다. 그걸 지운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유명인들의 온라인 표현은 단지 사적인 것이기보다는 사전 기획과 상당한 자본에 의해 이뤄진 행위인 경우가 많다. 즉 온라인 공간에서는 표현이 곧 행동이다. 이런 곳에서 과거에 했던 사소한 표현은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는 단초로 간주된다. 19세기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단순한 말실수에도 그 사람의 무의식적 욕망이 담겨 있다고 봤다. 현재 온라인 세대가 표현을 대하는 태도는 프로이트의 말실수라고도 불리는 ‘프로이디안 슬립’과 비슷하다. 그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동안 숨겨왔던 그 인간 혹은 그 조직의 본질인 것이다.

〈불안 세대〉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는 지금 세대가 인류 역사상 가장 안전을 중시하며 성장한 세대라고 말한다. X세대는 자신들은 놀다가 다치고 싸우다 우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어째서인지 자기 자식들은 강박적으로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키웠다는 거다. 그 결과 안전의 범위는 단순히 신체적인 안전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안전, 심지어는 지적인 안전으로 확대됐다. 나를 불안하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위험하므로 차단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해지기 시작했다. 자기 아이가 열등감을 느낄 수 있으니 학교 교실에서 문제 풀이를 시키지 말라는 학부모의 요구가 그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군가에게 주어진 표현의 자유가 내 심리적 안전을 위협한다면 그건 위험한 것이니 나락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도 충분히 가능하다. 문제는 이렇게 모든 면에서 안전을 추구한 결과, 지금 세대가 그 어떤 세대보다 정신적인 회복력이 낮은 세대이자 불안에 시달리는 세대가 됐다는 거다. 성장은 심리적 고통을 수반한다. 불안은 나락으로 보낸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감정은 보호한다고 건강해지지 않는다. 그저 성장의 기회를 빼앗을 뿐이다.

나락 문화가 반드시 나쁜 건 아니다. 어쩌면 온라인 공간의 자정작용 시스템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게 시대적 현상이라면 내가 여기서 뭐라 떠든다고 달라질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쉽게 나락으로 보내는 세상은 불안하고 허약해지기 쉽다. 진짜 사람은 단순히 겉모습만으로 알기에는 깊고 복잡한 존재다. 온라인에서 누군가를 안다는 건 사실상 그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얕게 많은 사람을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누군가를 깊이 아는 것도 중요하다. 진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은 힘들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나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고, 내 마음의 회복력을 키워준다. 이미지만의 사람이 아니라 진짜 사람들과 사귀고 사랑에 빠져 상대방의 깊은 속을 이해하게 되면서 우리는 그들뿐만 아니라 내 속의 우주를 발견하며, 다시 타인 속의 우주에 호기심을 가진다. 그런 호기심을 등대 삼아 우리는 자기 마음속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잊지 마시라. 누구를 나락으로 보낸다고 해서 결코 당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Writer 장근영(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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