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이후 어려운 사람 위해 강자와 싸우는 기독교 등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100년사'·'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저자 인터뷰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1960년대 이후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힘이 센 사람들과 싸우는 기독교가 등장했지요."(손승호 박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 처음에는 선교나 복음 전도가 굉장히 중요했지만 1970년대나 1980년대에는 사회에 참여하는 기구로서의 NCCK가 있습니다." (안교성 장신대 은퇴교수)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며 민주화와 사회변혁을 위해 노력한 것이 한국 기독교 사회 운동 역사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두 전문가는 입을 모았다.
NCCK의 100년을 돌아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100년사'와 약 150년에 걸친 한국 개신교 사회 운동을 소개하는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1∼3권) 출간을 기념해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사무국장인 손승호(44) 박사(교회사)와 안교성(66) 장신대 은퇴교수(역사신학)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손 박사는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공동 집필자 중 한명이다. 연말 개관 예정인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인 안 은퇴교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100년사'를 집필했다.
손 박사는 NCCK 인권위원회의 설립을 특히 의미 있는 사건으로 지목했다.
인권위는 1974년 4월 11일 첫 모임을 거쳐 같은 해 5월 4일 임원을 선임하고 회칙을 확정하면서 정식 출범했다. 노동운동이나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구속된 노동자나 학생 등을 위한 법률구조가 대표적 활동이었다. 1977년 무렵에는 홍남순·이돈명 등 인권 변호사들이 법률구조 담당 위원으로 참가했다.
안 관장은 "NCCK를 많은 사람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은 목요기도회"라고 말했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는 "남산부활절연합예배사건 1차 공판을 앞두고 정동제일교회에서 함께 기도를 드린 후 재판을 참관하러 간 것이 목요기도회의 기원이지만 공식적인 시작은 1974년 7월이었다"고 기술한다.
목요기도회는 "일체의 집회가 금지되어있는 비상계엄 상황 속에서도 종교예식의 형식을 빌려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흔치 않은 모임"이었으며 구속자 가족은 "목요기도회를 통해 서로를 확인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 관장은 "(당시에는) 언론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해 유언비어가 생겼는데 (목요기도회가) 정보를 나누는 통로가 됐고, 어려운 분들이 서로 돕는 연대의 자리였다"고 말했다.
당시 개신교계에 상반되는 기도 모임이 함께 존재한 점도 흥미롭다. 1968년부터 거의 매년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렸는데 목요기도회(1976년 5월 3일∼1979년 10·26 전까지는 금요기도회로 운영)가 생기면서 친정부적 기도회와 정부에 저항하는 기도회가 공존한 것이다.
안 관장은 "친정부적인, 국가를 위한 국가조찬기도회가 있었고 여기(목요기도회)는 수감자, 핍박받는 사람들, 약자를 위한 최후의 보루 혹은 피난처 역할을 했다"며 "두 개의 대조적인 기도회가 있었다"고 풀이했다.
기독교 사회 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NCCK 사무실이 있는 한국기독교회관이다. 1969년 12월 완공된 이 건물에는 기독교방송(CBS, 1992년 12월 목동으로 이전)을 비롯한 여러 교계 단체가 입주해 엄혹했던 시절 서로를 지지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개신교 신자인 전태일(全泰壹·1948∼1970) 열사가 분신한 후 강원용 목사가 사람이 죽어가는 현실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고, CBS가 이를 설교 방송으로 내보내 전태일의 죽음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손 박사는 전했다.
계엄군의 광주 시민 학살에 침묵해야 하는 모순에 분노한 김의기(1959∼1980) 열사가 1980년 5월 30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투신해 목숨을 끊은 곳이 한국기독교회관이다. 보안사로부터 운동권 수사 협조를 강요받다 탈영한 윤석양 이병이 1990년 10월 4일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기록을 공개한 장소도 한국기독교회관(NCCK 인권위 사무실)이었다.
손 박사는 한국기독교회관이 "기독교 사회운동의 중심 공간"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는 개신교 인사들이 3·1운동에 앞장선 것이나 유신체제에 저항한 것처럼 자랑스러운 역사는 물론, 제국주의 일본에 협조하거나 이승만 정권 시절 권력에 유착해 지탄받았던 것 등 어두운 역사도 함께 다뤘다.
손 박사는 "저자들이 모여서 공(功)만 다루지 말고 과(過)도 함께 다루자는 이야기를 했다"며 "우리는 편안하고 안전한 상황에 살면서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선배들의 삶을 일방적으로 난도질하면 안 되기 때문에 조심스러웠지만 비판할 점이 있다면 넣기로 했다"고 집필 과정을 회고했다.
종교의 위기에 관한 견해도 밝혔다.
안 박사는 "신세대들은 전통적인 종교를 전 세계적으로 거부한다"며 이들은 주어진 것을 소비하기보다는 자기 주도의 삶을 좋아하고 이른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트렌드를 소개했다.
그는 한국 교회 전체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젊은이들에게 맞는 영적인 지도를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며 "변신이 가능하다면 미래가 어둡지는 않다. 그러나 전통적 모델 그대로 복귀하려고 하면 가망이 별로 없다"고 조언했다.
손 박사는 기독교 사회운동이 집중해야 할 과제로 생태·환경 운동을 꼽았다.
그는 "신·구교 연합으로 (19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생기면서 한국의 환경 운동이 시작됐다"면서 "과거에는 환경이 진보 (진영의) 이슈였지만 이제는 생존 이슈"라고 강조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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