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학교에 들어가 쉬는 기간 없이 바로 사회에 나온 나는 선배들에 이어 이제 두세 살 많은 친구들이 차례로 쉰 살이 되는 걸 보고 있다. 서른이나 마흔 살 때도 갑자기 들이닥치는 빚쟁이 같은 나이의 매듭 앞에 그간의 삶을 급작스럽게 까뒤집고 정산당해 봤는데, 아무래도 쉰 살은 또 다른 모양이다. 서른 살은 더 이상 어리지 않으니 까불고 놀 때가 아니라는 자각, 마흔 살은 앞으로 기회가 줄어들 수 있으니 슬슬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현실 인식을 줬다. ‘쉰 살’은 내 삶이 나도 모르는 새 반환점을 돌았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지금부터는 중요한 것만 남겨야 한다는 위기감에 가깝다. 그렇다면 나이 먹는 것은 하나씩 잃어가는 일인가? 청춘의 외적 아름다움을 잃어간다고 해서 서글픔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자긍심을 가져온 부분이 지적 순발력이나 재치라는 점이다. 또 체력과 활기, 거기로부터 나오는 단순한 명랑성,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회복하는 힘에 기대왔다. 두뇌가 무뎌지고 몸이 무거워지면 이 다음에 무엇이 올까? 갱년기가 닥치면 관절이 삐걱거리고 열감이 치솟아 잠을 못 잔다는 얘기를 들으면 아리 에스터 영화 예고편을 보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엘르〉에서 10월호 ‘Hear Me Roar’ 화보 프로젝트의 인터뷰어로 참여해 달라는 제안이 왔을 때 그래서 수락했다. 인터뷰이 예수정은 연극과 드라마, 영화 분야를 오가며 자신의 활동 반경과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배우다. 윤여순 전 LG아트센터 대표는 대기업 퇴임 이후 자발적 공부를 이어가 리더십 코치로 일한다. 쉰 살을 넘기고 예순 살을 넘긴 뒤에도 자신의 힘으로 세상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니 얼마나 귀한 자리인가.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종종 듣는데, 내 추구미가 그 쪽은 아니라는 생각도 있다. 10대 때도 딱히 귀여운 편은 아니었고, 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느냐면 유능하고 단단한 사람, 가능하면 유머가 있는 인물 쪽이었다. 그러니까 내 미래를 투영해 그려볼 수 있는 언니들의 구체적 사례를 더 접하고 싶었다. 절대로 귀엽다고 할 수 없는, 만만치 않은 장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날 나는 봤다. 한국인을 온통 둘러싼, 인스타그램 릴스나 신사역 병원 광고판이나 세계관 바깥에 아름다움이 있음을. 거대한 성형과 미용 산업이 필터를 몇 겹 씌운 광택 질감의 매끈함이 전부가 아님을. 물론 패션 매거진의 전문가 스태프들이 멋진 모습으로 변신시킨 촬영현장이기는 했지만, 그런 꾸밈을 다 덜어낸다 해도 그들에게는 대화의 희열과 통하는 멋이 있었다. 무엇에 호기심을 갖고 에너지를 발산하며 눈을 반짝이는 자세, 우아한 목소리와 정돈된 화법, 몸으로 겪어온 풍부한 예화의 힘,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데려오는 신선한 어휘는 사람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그런 게 진짜라고, 의미 있다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었다. 그런 사람의 옆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설득이 됐으므로.
여전한 질문들과 내가 채워가야 할 답의 자리를 비워둔 채로 다만 괜찮을 거라는 용기를 얻어왔다. 인터뷰는 2024년 9월 어느 날의 일이었지만 그 하루보다 그들이 내내 살아온 생의 한 조각, 삶의 몇 문장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들여다본 기분이기도 했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스스로를 작게 놓아봤다. 자꾸 멈춰 뒤돌아보는 대신 계속해서 걸어가자고 마음먹는다. 몇 살을 먹든 현재진행형의 삶을 사는 건 내 선택인 것이다.
황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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