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일보] 이혜영 기자 = 20년 전 오늘 경기 화성 봉담읍 와우리에서 21세 여대생 노 모 씨가 실종됐다. 평소 다니던 화성복지관에서 수영 강습을 받고 나온 노 씨는 저녁 8시 25분께 집으로 향하는 34번 버스에 올라 동생에게 "곧 간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노 씨는 10분 뒤 하차했고 버스 내부 CCTV에 찍힌 이 모습이 노 씨의 마지막이었다.
여기저기서 하나씩 발견된 소지품
휴대전화 전원이 꺼진 채 늦은 시간까지 노 씨가 돌아오지 않자, 가족은 실종신고를 했다. 가족과 경찰이 새벽까지 노 씨를 찾아다녔으나 노 씨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중 실종 이튿날 오전 7시 반께 복지관에서 집 반대 방향으로 4㎞나 떨어진 곳에서 한 신문 배달부가 "휴대전화를 주웠다"며 노 씨의 번호로 연락해 왔다. 노 씨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추정한 경찰은 지체 없이 빠르게 수색에 나섰다.
이후 오전 10시 반께, 인적이 드물지 않은 노 씨 집 근처의 대로변에서 노 씨의 상의가 발견됐다. 실종 사흘째에는 다른 지점에서 속옷과 화장품이 발견됐고 닷새째에는 동네 저수지 앞에서 수영복, 물안경, 가방이 나타났다. 실종 20일째에는 마지막으로 노 씨의 신용카드가 발견됐다.
노 씨를 납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범인은 마치 전시하듯 대범하게 노 씨의 소지품들을 흩뿌려놨고, 대규모 경찰력이 동원됐지만 정작 노 씨는 찾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경찰은 결정적인 증거 한 가지를 찾아냈다. 노 씨의 바지에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남성의 정액이 묻어있었던 것.
범인, 금방 잡힐 거라 생각했지만
노 씨가 버스에서 하차한 지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약 30분 거리였다. 가족들에 의하면 노 씨는 집까지 들어가는 데 습관상 택시를 이용했으므로, 경찰은 가장 먼저 화성지역 택시 기사들을 용의선상에 올렸다.
경찰은 1000여명의 택시 기사에 더해 전과자들도 조사했지만 청바지에서 나온 정액의 DNA와 일치하는 인물은 없었다.
수사가 답보상태에 빠진 가운데 노 씨가 발견된 건 실종 47일 만이었다. 동네 야산에 손님과 함께 땅을 보러온 부동산업자가 부패한 시신을 발견했고 이는 노 씨로 밝혀졌다.
부검 결과 노 씨의 시신에서는 치명상을 유발할 만한 흔적이 없었다. 이에 사인은 경부압박 질식사였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다.
노 씨의 위에서는 소화되지 않은 떡과 채소 등이 나왔는데 노 씨가 실종 당일 오후에 먹었던 음식이 떡볶이였으므로 이는 노 씨가 실종 당일에 곧바로 사망했다는 걸 의미했다.
결국 미제로 남은 '화성 여대생 살인 사건'
노 씨가 사망한 이듬해, 가까운 용인의 외진 버스 정류장에서 한 남성이 '호의동승' 수법을 이용해 버스를 기다리던 25세 여성을 차에 태웠다. 차에 탄 여성은 강간당한 뒤 곧바로 살해됐다. 그런데 이 여성의 경우에도 노 씨처럼 사건 현장 인근 도로변에서 소지품이 발견됐다.
경찰은 이 남성을 체포해 노 씨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DNA 검사를 의뢰했지만 청바지의 정액에서 나온 DNA와 일치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잊혀 가던 노 씨 사건은 2015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청바지에 묻어있던 DNA가 오염됐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해당 DNA는 분석 당시 노 씨의 것과 범인으로 추정된 남성의 것이 섞인 혼합형으로 나왔는데, 알고 보니 남성의 DNA는 분석을 맡았던 국과수 연구원의 유전자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 확인 요청에, 국과수는 "시료에 연구원의 DNA가 섞여 들어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해당 시료가 신뢰성이 없는 증거물로 판단된다"는 입장을 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DNA 증폭 기술이 개발돼 오랜 세월 미제 사건으로 묻혔던 사건들이 해결되고 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이춘재 역시 증거품의 DNA 재감정을 통해 2019년 33년 만에 그 실체가 밝혀졌다.
하지만 노 씨 청바지의 행방은 묘연하다. 경찰은 "국과수 감정이 끝난 유류품이기 때문에 유족에게 돌려줬을 것"이라고 했지만, 유족은 "휴대전화를 제외하고는 소지품을 전혀 돌려받지 못했다"고 했다. 결정적 증거품이 사라지면서 망자의 한을 풀어줄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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