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청(靑)' 또는 '남(藍)'을 사랑한 우리 장인들

[미술로 보는 세상] '청(靑)' 또는 '남(藍)'을 사랑한 우리 장인들

연합뉴스 2024-10-26 08:00:0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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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서울 종로구 서촌을 산책하다 보면 주택가 한 가운데 운치 있는 장소를 만날 수 있다. 정원은 고즈넉하고 이층 한옥은 아담하다. '박노수 미술관'이다.

박노수 미술관 박노수 미술관

연합뉴스

현대 동양화가 1세대에 속하는 박노수(1927~2013)는 1955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는 등 화려한 초기 시절을 지냈다. 1970년대부터 남색과 하얀 여백이 지배하는 일군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1974년 그린 작품, '산수'를 지배하는 건 강 넘어 남색 산봉우리와 가운데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하얀 공간이다. 이 둘 덕에 바위는 굳세고, 산은 힘차게 솟는다.

'산수' '산수'

박노수 미술관 소장

동양화 특징은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시는 형체 없는 그림이며, 그림은 소리 없는 시'라고 말한 것처럼, 시(詩)·서(書)·화(畵) 통합이다. 박노수 그림이 그렇다.

박노수 그림에서 여백은 단순히 안 그린 부분이 아니다. 사색과 상상의 여지를 둔다. 다른 부분과 어울리게 '옳은' 공간에 배치돼야 한다. 보이지 않는 정신을 그리는 게 동양화 제일 큰 특징이다.

시적 감성을 더해주는 건 박노수가 진심으로 사랑해 사용한 짙은 파랑 덕이다. 청색, 남색, 쪽빛, 울트라 마린 등 다양하게 불리는 그 색이다.

위에서 본 '산수'부터 1988년 작품 '산'과 1982년 작품 '조어(釣漁)', 1990년대 초에 그린 '유하(柳下)'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게 남색은 고민하는 색이었고, 마음을 흔드는 색이었으며, 간직하고픈 색이었다. 그래서 그의 호도 '남색 남(藍)'이 들어간 '남정(藍丁)'이다.

'산' '산'

박노수 미술관 소장

'조어' '조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유하' '유하'

박노수 미술관 소장

이 색은 프랑스 '누보 레알리즘(신사실주의)' 선두 작가였던 이브 클랭(1928~1962)이 영원히 사랑한 색이기도 하다. 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색이 'IKB(인터내셔널 클랭 블루)'라는 고유명사로 국제특허를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우리 장인들 남색 사랑이 더 앞선다. 고려청자를 이어받은 조선 시대 청화백자가 그것이다. '청화(靑畵)'란 '푸른색의 문양'이라는 의미로 '회회청(回回靑)' 안료를 사용한다. 페르시아에서 생산돼 중국을 통해 들어왔지만, 우리 고유의 색으로 승화시켰다.

15세기 말 작품으로 전해지는 '대나무 무늬 항아리'에 한 장인이 백자 위에 발휘한 영롱한 청색 문양은 대숲에 들어설 때 듣는 바람 소리를 연상케 한다.

'대나무 무늬 항아리' '대나무 무늬 항아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세기 작품으로 백색 위 청화로 채색한 '백자청채 무릎 연적'은 번짐의 채색 효과 덕에 은하수를 품은 밤하늘을 상상할 수 있다.

'백자청채 무릎 연적' '백자청채 무릎 연적'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박노수에 이어 남색을 사랑하는 현대 화가는 김춘수(1957~)다. '청색은 한국미 본질을 좇을 수 있는 깨달음의 여정'이라고 말한 작가다. 그가 빠진 푸른 기운은 전통과 현대가 동화(同化)된 기운생동(氣韻生動)이다.

'울트라 마린' '울트라 마린'

작가 소장

농사꾼 염료 장인 한광석(1957~)이 사랑한 색도 거의 같다. 그는 '쪽빛'으로 부르는 걸 고집한다. 시인 김지하는 그가 만든 색을 보며 '슬프다'고 했고, 작가 조정래는 '사무친다'고 했다.

그가 쪽빛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자연과 몸의 합일이라 할 만하다. 자연에서 얻은 꽃과 물, 햇살을 바탕으로 지난한 손놀림을 보태 끈기 있게 색을 빚어낸다.

한광석은 말했다. "쪽빛은 청(靑)인지 벽(碧)인지 남(藍)인지 꼭 짚을 수 없는 까마득한 색입니다"

한광석이 빚어낸 색 한광석이 빚어낸 색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미쳐야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청화백자 장인부터 박노수, 김춘수, 한광석, 이브 클랭은 모두 청색에 미친 사람들이다.

박노수 그림을 다시 본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한 편의 시를 읊는 것이라고 했다. 시에는 슬픔, 아득함, 그리움, 사무침 등 인간이 스쳐 가는 모든 감정이 담겨 있다.

그래서 박노수 그림은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길이 없다. 이름 모를 장인이 만든 청화백자에 빠져들어 눈이 멀 듯이. 풍덩.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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