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 속 악마의 표정과 연쇄 살인마의 표정을 교차한 연출로 현장에서 뜨거운 박수를 받았던 〈아티스트〉.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가 소극장을 가득 채웠다. ‘2024 CHANEL×BIFF 아시안 필름 아카데미(CHANEL×BIFF Asian Film Academy)’(이하 BAFA) 수료식이 개최된 10월의 늦은 밤. 아시아 13개국에서 참가한 23명의 펠로들이 20일 간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을 확인하는 자리에는 순수한 열정과 따뜻한 격려의 에너지가 넘실거렸다.
차세대 아시아 영화인을 발굴하고, 이들의 네트워크 구축을 도모하기 위해 2005년에 설립된 BAFA는 지난 2022년, 샤넬과 함께 새로운 탄생을 알렸다. 항상 동시대 예술 후원자로서 다음 세대에 주목해 온 샤넬이 BAFA 공동 주최로 합류해 아시아영화의 미래를 그려 나갈 인재들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올해로 3년째 BAFA와 함께하고 있는 샤넬과 영화의 인연은 매우 깊습니다. 가브리엘 샤넬 여사가 1930년대 영화배우들의 의상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영화인을 위해 꾸준한 지지를 아끼지 않는 샤넬이 이 행사를 후원할 수 있다는 것은 영광입니다”라는 샤넬의 진심어린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 말이다. 상금을 비롯해 독일의 세계적인 영화제작업체 ‘ARRI’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트레이닝 참여, 미국영화협회와 공동 주최하는 MPA 어워드 수여 등 실질적인 지원도 뜻 깊지만 BAFA의 핵심은 ‘함께 영화를 제작하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 그 자체다.
서로 든든한 촬영 팀이 돼 주었던 BAFA 과정.
총 23명의 펠로가 참석한 이번 BAFA의 특징은 여성 영화인들의 비율이 높았다는 것.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회상하는 딸의 마음을 포착한 <좋은 밤>.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의 산실이 된 도시에서, 동료들과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특별한 여정에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올해는 34개국에 걸쳐 613명이 지원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선정된 23명의 펠로들에게 주어진 9월 22일부터 10월 11일까지 20일의 시간 동안 이들 사이에 얼마나 특별한 유대감이 쌓였는지는 펠로 한 명 한 명이 호명될 때, 도움을 준 멘토들과 스태프들이 단상 위에 오를 때 순수하게 쏟아진 함성과 박수갈채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막상 눈앞에서 바라보니 닮았으면서도 너무나 다른, 그러나 영화에 대한 애정만으로 이 낯선 곳까지 올 결심을 한 이들의 소감을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BAFA 기간 동안 고국에 전쟁의 긴장감이 감돌며 “친구들과 주변인들의 안위가 위협받는 중에 작업한다는 게 쉽지 않았음”을 털어 놓은 자헤르 주레이디니(레바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면 관객 또한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할 것”이라는 소감을 공유한 애니 송(중국)을 비롯해 2관왕에 빛난 미얀마 출신의 세인 라이언 툰의 진솔한 소감은 참석자 모두에게 큰 울림을 줬다. 펠로 중 가장 연장자인 탓에 “이곳에 와서 많은 손자들이 생겼다”는 농담으로 시작한 수상은 “항상 기다림과 거절을 반복적으로 겪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거절의 경험을 딛고 비로소 이곳에 있게 됐다. 다들 동료를 보며 용기를 얻길 바란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길”이라고 말하여 BAFA의 존재 의의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단편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순간적인 긴장도와 에너지를 이끌어낸 〈당신이 남긴 것〉.
수료식 이후 진행된 애프터 파티에서 단체 사진을 남긴 참가자들의 밝은 표정.
수료식의 하이라이트인 총 여덟 편의 단편영화 상영을 앞두고, 프리프로덕션부터 포스트프로덕션까지 펠로들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이 한 장 한 장 스크린에 걸렸다. 단독주택. 편의점, 대형 마트, 항구, 방파제, 한옥….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친숙한 부산 풍경에 영화 장비들을 이고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 때로는 카메라 렌즈를 향해 활짝 웃고, 때로는 눈앞에 놓인 뷰파인더에 날카롭게 몰입하고 있는 옆 얼굴, 확실한 꿈을 좇는 사람들만이 가진 눈빛…. 모든 꿈이 반드시 이뤄지지는 않는다. 모든 잠재력과 가능성이 근사한 결과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날 밤 영화의전당에는 꿈을 가진 사람들의 반짝임이 있었다. 짧지만 누군가의 마음에는 오래 남을 수 있는 마땅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것도 틀림없다. 그리고 또 다른 꿈을 응원하는 자리에 샤넬은 계속 함께할 것이다.
인어와 적극적인 등대지기의 성적 긴장감을 그린 〈러스트〉 촬영현장.
영화는 관객 신체의 일부가 되는 것
부산을 배경으로 진행된 프로덕션.
부산을 배경으로 진행된 프로덕션.
「
헌사의 또 다른 주인공. ‘CHANEL×BIFF 아시아영화아카데미’ 교장으로 여정을 함께한 장률 감독.
」
‘2024 CHANEL×BIFF 아시아영화아카데미’ 교장직은 어떤 마음으로 수락했나요
부산국제영화제와의 인연 때문이죠.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제 영화 〈망종〉이 수상한 것을 비롯해 제가 성장하는 데 매번 큰 도움을 줬기 때문에 부산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어요. 20여 년 넘게 영화에 종사하면서 영화와 영화교육의 연결 고리를 나날이 실감해요. 저는 영화교육을 받아본 적 없기 때문에 절박감이 더 컸습니다. 영화에서 협업과 계승은 아주 중요한 관계니까요. 이런 과정에 제가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영광이죠.
30대 후반의 나이에 아카데믹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에 지원한 펠로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교육을 받은 적 없다는 게 제가 가진 가장 큰 아쉬움 중 하나인 건 사실입니다. 제가 영화 일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관련 교육을 받지 못한 것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터라 스스로 그 부분을 필사적으로 채워 나가야 했죠. 이런 제가 학생을 가르친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정말 저는 가르치는 과정에서 학생들한테 더 많은 걸 배웁니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어요. 영화교육을 받을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를 소중히 여기라고요.
그럼에도 샤넬의 든든한 지원 하에 아시아 각국에서 모인 영화학도들과 20일 남짓한 여정을 함께하는 건 또 다른 일인 것 같습니다. 이 제안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젊은 영화인들이 촬영하고 창작 작업을 하는 걸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죠. 영화를 제작할 때는 촬영이 끝난 후에 나태해지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교육을 받는 동안에는 매일 활기 찬 컨디션으로 영화와 끈끈해지니까요. 무엇보다 영화는 청춘의 힘을 필요로 하는데, 영화학도들은 호기심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충만해요. 사실 가르치는 일은 즐거움보다 책임감이 더 큽니다. 특히 영화는 여러 사람들이 협력해서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에 책임감이 중요하죠. 교육을 통해 이런 책임감을 더 기를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촬영감독 카밀라 안디니와 일본의 우라타 히데오 촬영감독이 멘토로 함께했는데
두 분 모두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셨어요. 학생들과 나날이 유대감이 생겨나는 걸 느낄 수 있었죠.
포스트프로덕션 작업은 부산의 영화 전문가들과 함께했다.
학생들과 함께하며 얻은 에너지가 있다면
열심히 준비하고, 열정을 다해 촬영하며 협력하는 과정은 모두 비슷해요. 다만 젊은 학생에게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에 활력이 넘치거든요. 그리고 이는 신인이든 베테랑이든 모두가 갖춰야 할 태도죠. 어쩌면 학생들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는 것들을 통해, 우리도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을 수도 있고요.
약 20일 동안 3분짜리 단편영화 여덟 편이 탄생했습니다. 두 편을 제작했던 이전에 비하면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죠. 교장으로서 이 ‘임무’가 어떻게 와 닿았나요
올해는 감독들이 자신의 단편영화를 연출하는 것 외에도 서로의 연출 팀 멤버가 되는 새로운 규정이 생겼어요. 창의성을 발휘해서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이죠. 이런 식으로 역할을 바꿔보는 것이 감독이 된 후에도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독이 표현해야 하는 감정과 인물에는 내 몫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몫도 있거든요.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OTT 시대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다를 것 같습니다
시대적 감성은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창작자들은 늘 지금의 분위기를 토대로 고유한 감성을 포착해야 하죠. 하지만 어떤 시대든 간에 청춘의 공통점은 있습니다. 각자가 포착한 새로운 관점을 토대로 인간의 감정을 포착할 때 작품이 단단해질 수 있어요.
여성 영화인의 참여율이 크게 늘어난 것도 특징입니다. 영화계에서 여성들의 활약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감도 있을지
이번 아카데미에서 남녀 비율이 거의 반반이었습니다. 정말 좋은 현상이죠. 어느 나라에서든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고된 환경과 장비의 불편함을 강조한 탓에 남자들이 하기에 더 적합한 일로 여겨졌지만 이건 예전에도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이런 장애물을 핑계로 여성 영화인들의 진출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딱딱한 세상에 영화 여성인들의 등장은 한 줄기 햇살 같아요. 작품은 물론 현장의 관계도 따스하게 만들죠.
어느덧 3회 차에 접어든 CHANELx BIFF 아시안 필름 아카데미를 이끈 주역들. 맨 오른쪽에 교장직을 맡은 장률 감독도 함께 섰다. 가운데에 서서 뿌듯한 미소를 보내는 멘토 카밀라 안디니와 우라타 히데오.
10월 10일 저녁, 영화의전당에서 개최된 수료식과 상영회를 위해 펠로와 배우들이 객석을 가득 채웠다.
경주, 두만강, 군산, 후쿠오카 등…. 감독님의 필모그래피에 ‘지명’이 함께하기 때문일까요? ‘아시아의 지역성을 잘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재중 동포 3세기도 하고요
저는 많은 아시아 국가와 도시를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 일본, 심지어 몽골에서도 촬영한 적 있죠. 〈경주〉 〈후쿠오카〉를 촬영하며 아시아 각국의 교류가 얼마나 긴밀하게 이뤄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인의 삶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예요. 인터넷 시대가 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서울과 부산에서 매일 중국어나 일본어를 들을 수 있는데 이는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물리적으로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고, 상호 영향을 주면서 재미있는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단일민족이나 단일국가에서 벗어난 주제들이 점점 많이 다뤄지고 있는 것도 영화의 새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어떻게 융화될 수 있는지, 이런 점들이 영화인이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잊지 않아야 할 감각은
감정입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작가는 펜을, 화가는 붓을, 영화인들은 시청각 언어를 사용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감정과 시청각적 요소가 하나가 돼 관객 신체의 일부가 되는 거죠. 인연이 깊은 부산에서,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부산국제영화제는 정말 흥미로워요. 관객 대부분이 젊은 층이라 청춘의 활력이 넘치죠. 분명 좋은 일이지만 가끔 관객석에 머리가 하얀 어르신도 보고 싶습니다. 백발의 노인들을 부산영화제 관객석에서 마주했을 때 비로소 청춘이 완성되는 거죠. 모든 연령대는 창의력과 청춘이 필요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