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MBC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촬영이 한창이죠.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우선 오랜만에 화보 촬영을 해서 즐거웠어요. 올해 첫 화보거든요. 화보는 내 안의 다른 사람을 찾는 기분이라 늘 재밌어요. 드라마 촬영은 막바지라 놓치는 게 없는지 살펴보는 중이죠. 이야기가 촘촘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톤이 달라지면 다른 걸 의도하는 연기가 되더라고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의도한 것처럼 된다거나 의도한 게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 감독님, 배우들과 꼼꼼히 체크하고 있어요.
어떤 부분을 세밀히 체크하는 걸까요?
대사를 수정할 때도 그렇고, 형사팀과 범죄행동분석팀이 서로 어느 정도까지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계속 확인해 요. 극의 흐름대로 작품을 찍으면 좋겠지만, 상황에 따라 그럴 수 없는 경우도 많잖아요. 다른 작품을 촬영할 때 의도치 않게 연결이 어색해진 경험이 있어서인지 더 신경 쓰이는 것 같아요. 다행히 이번 작품은 거의 순서대로 찍었어요. 감독님도 그렇게 하길 바라셨고요.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몰입하기 좋겠어요.
그렇죠. 첫 촬영이 첫 신은 아니지만, 대체로 스토리에 맞춰 찍고 있어요.
다소 무거운 작품인데, 촬영이 끝나면 먼저 뭘 하고 싶어요?
특별히 가벼운 걸 찍고 싶다거나 탈출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오히려 좋은 사람들과 재밌게 작업하고 있어 이 건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다른 현장에 가보고 싶기도 해요.
어떤 게 가장 재미있는지.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가장 크죠. 많은 배우가 느낄 텐데, 촬영하고 나면 결과는 내 손에서 떠나는 거라 크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오로지 현장에서 절실히, 열심히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같은 마음으로 만들어가는 동료들이 있는 현장이 감사해요. 지금 작품 촬영 현장이 그렇고요. 고갈된 상태면 다음 작업을 하고 싶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 최적의 상태일 때 또 다른 현장에서 에너지를 잘 표출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3년 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했어요. 작품 선택에 큰 영향을 준 게 한석규 배우의 출연이라고 알고 있는데, 함께 호흡하는 소감은 어떤가요?
정말 좋아하는 선배님이에요. 극 중 제가 맡은 ‘어진’이란 인물도 우상시하는 사람이 선배님이 맡은 ‘장태수’ 역이라는 점이 저와 맞닿아 있고요. ‘언제 또 같이 작업하는 기회가 올까’ 하면서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한석규 선배를 보면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저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현장에서 경험이 많은 동료로서 아낌없이 응원해주고 지지해주시죠. 본인의 촬영 분량이 워낙 많아 예민하거나 힘들 법도 한데, 대사 치다 NG가 나면 “나도 이렇게 많이 실수한다”고 농담하면서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주기도 하세요.
또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스스로 연기에 대한 불씨를 꺼뜨리지 마라”는 얘기를 해주셨어요.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이유로 연기를 그만두는데 그건 결국 자신이 포기하는 거라고, 그래서 내면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고요. 저도 느끼는 거지만, 선배님은 오랜 시간 배우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사라지는 배우를 많이 보셨을 거예요. 반짝이는 후배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하신 말씀 같아요. 그 말이 참 와닿았고, 자멸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무용은 너무 좋아했던 첫사랑 같아요. 함께한 시간이 강렬해서 잊을 수 없어요
연기는 그다음에 찾아온 사랑이라 좀 더 성숙하게 대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하지만 나를 지켜가면서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하고 있죠.
담백하지만 따듯한 조언이네요. 현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 건가요?
현장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어요. 배우는 계속 대본을 보고 암기해야 하니까 시력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실질적 조언부터 “배우가 이렇게 밥 벌어먹고 산다는 게 너무 감사하지 않니”라는 말까지 인간적인 모습으로 편안하지만 좋은 말을 들을 수 있어 감사했죠.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2021년 MBC 드라마 극본 공모전 수상작이기도 해요. 대본을 읽으면서 기대 되는 점이 있었나요?
장태수와 딸 ‘하빈’은 부녀 사이지만, 서로 의심하는 상황이잖아요. 취조를 하는데 장소가 경찰서가 아닌 집 안 식탁에서 이루어지는 게 흥미로웠어요. 가장 편한 집에서 긴장감을 갖고 진행되는 장면이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했죠.
형사 역도 처음이죠?
대부분 생활 연기를 많이 했어요. SBS 드라마 <스위치 – 세상을 바꿔라>에서 맡은 검사 역할 말고 이런 분야 캐릭터는 드물죠. 캐릭터를 준비하면서 프로파일러 선생님께 자문을 구하며 연쇄 살인마나 사이코패스 같은 범죄자 성향을 알게 됐고, 몰랐던 사실도 들었어요. 취조할 때 용의자 앞에서 노트북에 뭘 쓴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녹음 중이기 때문에 쓰는 건 거의 액션이고 그 사람의 얼굴이나 표정, 근육, 몸의 움직임을 본다는 거예요.
갑자기 프로파일러 앞에 있는 듯 긴장되네요.(웃음) F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서 ‘대문자 T’인 어진을 이해 하기 위해 애썼다고 했는데,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원래 제 성향은 노재원 씨가 맡은 ‘구대홍’에 가까워요. 주변의 T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대홍이가 너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웃음) 어진이는 ‘다른 뜻 없이 얘기하는 게 전부’라고, 합리적 사고를 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도움 주려는 인물이라고 계속 생각했어요. 감독님도 제 캐릭터가 못돼 보일까 봐 걱정하셨는데, 어진과 대홍의 드라마틱한 대조를 보여줄 수 있으니 상관없다고 했죠.
어진이 아닌 ‘한예리’라면 어땠을까요?
만일 가족이 용의자로 의심받는다면 저는 심문하면서 울 것 같아요.(웃음) 아마 울상으로 “왜 그러셨어요” 하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게 많아서 하고 싶은 게 없는 것 같아요. 너무 광범위하니까.
저도 모든 배우가 그렇듯 좋은 작품을 하고 싶고, 그런 기회가 오길 바라요.
그럴 때 저를 좀 더 보여주고 한 꺼풀 벗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기억에 남는 장면도 있어요?
나중에 어진이가 흔들릴 때 대홍에게 의지하는 장면이 있어요. 특별히 대사가 많지 않았는데도 그 장면이 참 와닿았어요. 두 사람은 성향이 다르지만, 서로를 보면서 배우고 보완하는 한 팀이기도 하죠.
오랜 시간 해온 무용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지난해 공연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2021년 통영국제 음악제에서 선보인 <디어 루나> 등 여전히 무대에도 오르고 있죠. 한예리에게 무용은 어떤 의미인가요?
무용은 첫사랑 같아요. 한때 모든 걸 바친 인생의 전부였죠. 떠나도 보고, 잡아도 보고, 다시 도전도 해보고. 함께한 시간이 강렬해서 잊을 수 없어요. 연기는 그다음에 찾아온 사랑이라 좀 더 성숙하게 대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무용을 하면서 뭐든 내가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최선을 다하지만 나를 지켜가면서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하고 있죠.
연기할 때 본인만의 신념이 있다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뭘 재밌어하는지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내가 하고 싶었던 게 뭔지 계속 찾는 거죠. 내가 선호하는 게 늘 대중적일 수는 없어요. 다만 취향을 명확히 알되 사람들이 뭘 좇는지 놓치지 않으려 하죠. 두 가지를 잊지 않고 잘 가져고 해요. 예전에 윤여정 선생님이 “예리야, 돈도 중요하지만 돈 때문에 작품을 가리면 안 돼”라고 하신 말씀을 종종 떠올려요. 너무 따지기보다 좋은 작품에 ‘감사’하며 재지 않고 할 필요도 있다는 이야기였죠.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작품이 있나요?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요. 충격적일 만큼 좋았어요.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어떻게 더 새로울 수 있을까 했는 데, 정말 새롭다고 느꼈어요. 영화적 표현을 가장 이상적으로 하는 영화였죠. 사운드가 주는 공포감도 컸고요. 맞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도 재밌게 봤어요. 에이리언은 시리즈를 다 봤거든요. 오마주 장면이 많이 나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어요.
하고 싶은 작품도 있는지 궁금해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했어요. ‘왜 난 하고 싶은 게 없을 까’ 싶었죠.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게 많아서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는 것 같아요. 너무 광범위하니 까. 저도 모든 배우가 그렇듯 좋은 작품을 하고 싶고, 그런 기회가 오길 바라요. 그럴 때 저를 좀 더보여주고 한 꺼풀 벗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떤 작품이든 도전할 준비가 돼 있다는 이야기로도 들려요.
맞아요. 배우는 누군가 불러주지 않으면할 수 없는 직업이잖아요. 그래서 더 열려 있으려고 해요. 내가 너무 많은 걸 정해버리면 되레 불가능해지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니까. 그래서 더가볍게 생각하려고 하죠.
대화를 나눠보니 상상하던 ‘한예리’보다 더 유쾌하고 털털한 느낌이에요.
걱정이에요. 제가 너무 진지하고 무거워 보이나 봐요.(웃음) 한 사람의 중요한 어떤 시절을 보여주는 역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송연화 감독님도 현장에서 귀여워해주시더라고요.(웃음) 앞으로 나이 잘 먹으면서 유쾌한 모습도 조금씩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주 명랑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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