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책들이 쏟아지는 찬사 속에 베스트셀러 10위권을 휩쓸고 있다. 한편으로 노벨상 수상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하나의 사안에 두 가지의 극적인 냉온 반응이다.
엄밀히 근원을 따지자면 노벨상은 오물 속에서 탄생한 상이다. 다이너마이트 발명으로 거부가 된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이 남긴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상이다. 생전에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가장 후회하는 발명품’이라 했다. 그가 죽기 한 해 전인 1895년 “매년 인류의 문명 발달에 학문적으로 기여한 사람에게 상을 주라”는 유언에 따라 해마다 노벨의 기일(忌日)인 12월 10일 시상식을 갖는다. 깊은 회한을 뿌리로 하여 탄생한 상이 어느덧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이 된 것이다.
하마평에도 없던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세상 모두의 관심이 한강 작품에 집중되고 있다. 물론 노벨상이라는 후광만으로 한강의 작품이 최고의 경지 작품이라고 찬양받을 수는 없다. 노벨상이 최고의 영예가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그 스스로도 수상 소식에 담담한 반응이다. 또 다른 시각으로 한강은 역사의 외눈박이일 수도 있다. 5·18은 1970년생 광주출신 한강이 10살이었을 때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소설이니까 허구가 있을 수 있다. 가공된 역사를 그대로 역사라고 후손들이 받아들이는 걸 우려하는 이들의 걱정도 이해는 간다.
사람들은 지금 각자 자기가 보고 있는 방향을 정방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는 상태에서 각자 직립의 정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긴 역사에서, 역사는 소수의 계몽하려는 자들에 의해 끌려왔다. 표면적으로 그렇다. 그러나 긴 호흡으로 보면 역사는 그들 소수 능력자, 엘리트, 계몽주의자들에게 끌려간 흔적은 드물다. 때마침 그가 태어났고 그에게 깃발이 주어졌을 뿐이다. 후손인 우리들에게 그렇게 보일 뿐이다. 항상 이변이 있었고 사람보다 더 큰 자기장의 흐름이 작용했다.
소설은 항상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실화를 비틀고 덧붙이고 가공해야만 ‘픽션’의 재미난 이야기로 거듭난다. 그런 면에서 창작의 본질은 왜곡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소설은 왜곡이 있기에 빛난다. 이런 이유로 역사학자와 역사 기반의 창작물들은 충돌한다. 특별한 충돌이 아니라 당연한 충돌이다. 지금 한강의 작품들이 역사의 왜곡이다 포르노다 조작되었다 등의 이야기로 논란의 중심에 선 이유다.
어떤 스탠스가 바람직할까? 노벨상을 탔으면 박수를 쳐주면 된다. 아니라면 박수를 거두면 된다. 데모도 하나의 의견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다른 의견도 있음을 알리는 하나의 표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과하게 다른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거나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하면 또 다른 편향이 생길 수 있다.
글이 있으면 독자가 있고 독자는 각자의 경험과 지식과 앵글로 글을 읽고 받아들인다. 각자의 앵글은 존중받아야 하고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아 걱정하는 조급한 마음, 기우에서 그들의 앵글을 바꾸거나 막아설 수는 없다. 당신이 상상하는 과정도 결과도 그들 몫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는 성구처럼 설령 후대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해도 그것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운명이다. 지금 우리들이 안달하고 이토록 열광하는 노벨상조차도 거부한 이들이 있었잖은가. 그러니 주고받는 이들의 문제로 치부하고 한숨 돌리자. 수상에 대한 소감, 의견을 넘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나의 이 행동이 또 다른 편향은 아닌지, 과도함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너무 후손까지를 책임지고 걱정하는 것 또한 광폭 오지랖이 아닐까? 일개인이 시대정신까지 리딩하려는 시도는 과욕이고 오만이다. 그럴 시간에 이 작품이 왜 이토록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는 건 어떨까?
한편으로 이 소란은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자유로운 가운데 균형 잡힌 사회라는 방증이다. 우리 몸에는 질병을 일으키는 악성 바이러스와 그들에 대항하는 착한 바이러스가 동시에 살고 있는 것처럼, 겉으로 매일의 청결함 속에서도 뱃속에는 매 순간 꽤 많은 변을 생산하고 품고 살아가는 것처럼. 그게 우리의 신체구조, 세상 구조, 운명이다. 선악도 호불호도 하나의 다름이고 그 때문에 이만큼이나 성장할 수 있었다 걸 아이러니가 아니라 행복으로 받아들이자.
나는 상상해 본다. 만약 한강의 노벨상 소식이 군부 독재시대에 전해졌더라면 어땠을까? 신문 방송 뉴스는 십중팔구 온통 박수와 환호로 도배되고 수상작 읽기를 강제하는 사회, 획일의 시대가 목도되었을 것이다. 그 시절을 보냈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북쪽 땅을 바라본다. 조금은 시끄럽지만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소란인가.
글: 최송목, 오십에 읽는 손자 병법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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