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원 칼럼]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기웃거리는 토끼①

[정혜원 칼럼]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기웃거리는 토끼①

문화매거진 2024-10-25 10:49:0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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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지난 5월, 갑작스럽게 패치워크라는 문화 기획 단체로부터 작업 제안을 받았다. 올해 10월 동인천 배다리에서 열릴 거리 전시를 기획 중인데 설치미술 작가로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기획서를 보기도 전에 참여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배다리는 나와 조금 인연이 있는 곳이다. 내가 인천 토박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년 한 해, 배다리에 작업실을 얻어 자주 발걸음하다 보니 어느새 배다리는 내게 친숙하고 알고 싶은 동네가 되었다. 그런 곳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의 작업에 대한 의욕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 작년, 동인천 배다리의 내 작업실 풍경. 창밖으로 배다리 삼거리가 내다보인다 / 사진: 정혜원 제공
▲ 작년, 동인천 배다리의 내 작업실 풍경. 창밖으로 배다리 삼거리가 내다보인다 / 사진: 정혜원 제공


배다리는 60~70년대에 책방이 줄지어 있던 동네다. 과거 동인천이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때는 배다리 일대도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이제는 쇠락하여 거리가 많이 한산해졌다. 거리를 걷다 보면 임대 중이라고 써 붙인 텅 빈 점포가 자주 눈에 띈다. 그럼에도 역사 깊은 몇몇 헌책방은 아직까지 남아 배다리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 그곳에 몇 년 전부터 여러 분야의 예술가, 문화 기획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천 구도심에 매력을 느낀 이들이다. 그들은 따로 또는 같이 다양한 문화 사업을 펼치는데 내게 연락한 단체도 그중 하나였다.

거리 전시를 위해 나를 포함해서 모두 일곱 명의 작가가 모였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아키비스트, 사운드 아티스트, 드로잉 작가, 조형 예술가까지 참으로 다채로웠다. 패치워크의 넓은 시야와 섭외 능력에 감탄했다. 10월 초 설치를 목표로 6월부터 9월까지 총 세 번의 기획 회의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 회의 날 나를 어떻게 알고 섭외했는지 패치워크 대표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 작업실이 배다리에 있었지만 나는 패치워크와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작업실에서 10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패치워크의 사무실이 있었지만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평소 주변에 별로 관심이 없는 탓이다. 패치워크에서도 나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별로 유명한 작가가 아니다. 

대표는 내가 만든 독립출판물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했다. 작년 말 출간한 설치미술 사진집 ‘산산이 부서지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산산이 부서지는 세계’는 2007년부터 2023년까지 기회가 닿을 때마다 틈틈이 선보였던 설치 작품을 망라한 책이다. 집 안에서 시험 삼아 하던 작업이 우연한 계기로 집 밖으로 번져 나가면서 꽤 여러 작업이 모였다. 내 설치 작업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철거되어 버려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설치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각별히 공을 들여왔다. 그렇게 쌓인 자료를 언젠가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 초기의 설치 작업. 방 안을 캔버스 삼아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연출하고 사진으로 기록했다 / 사진: 정혜원 제공
▲ 초기의 설치 작업. 방 안을 캔버스 삼아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연출하고 사진으로 기록했다 / 사진: 정혜원 제공


‘산산이 부서지는 세계’는 나의 지난 작업을 기념하기보다 애도하기 위해 만든 책이다. 책을 완성하고 나면 더는 설치 작업을 하지 말자고 내심 선을 그었다. 애써 만든 작품이 마지막에는 어김없이 철거되어 사라지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구축한 세계를 내 손으로 부술 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광경을 볼 때마다 작업 끝에 내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 전시장을 온통 빨간색 A4용지로 도배했던 첫 개인전. 설치에 보름 가까이 걸렸지만 철거는 한순간이었다 / 사진: 정혜원 제공
▲ 전시장을 온통 빨간색 A4용지로 도배했던 첫 개인전. 설치에 보름 가까이 걸렸지만 철거는 한순간이었다 / 사진: 정혜원 제공


사실 처음 집 밖에서 작업을 선보였을 때부터 내 마음은 진즉에 회의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첫 개인전에서 나는 사방의 벽은 물론이고 바닥과 천장까지 빨간색 A4용지로 가득 메웠었다.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3월, 날마다 갤러리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해가 지도록 곱은 손으로 콘크리트 벽에 투명 테이프로 색지를 붙였다. 설치에 보름 가까이 걸렸다. 그사이 지문이 다 닳아 문드러졌다. 그렇지만 철거는 한순간이었다. 어느 색지의 귀퉁이를 잡아당기자 다른 색지까지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종이끼리 테이프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철거는 한 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마칠 수 있었지만 그런 만큼 더더욱 허무감이 밀려왔다. 다시는 그런 무식한 작업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몸을 갈아 넣어야만 완성되는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 그저 고행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후에도 자꾸만 그런류의 작업을 할 기회가 생겼다. 작업에 대한 욕심 때문에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고 제안이 들어오는 족족 다 받아들였다. 이번 배다리 전시도 마찬가지다. 올해는 뭘 해도 잘 풀리지 않고 실수를 연발해서 새로운 일을 벌이지 말고 얌전히 집에 틀어박혀 있을 작정이었는데 다 틀려 버렸다. 깊이 고민하기도 전에 마음이 움직였고 결국 나는 나만의 동굴을 박차고 나와 배다리에 가 있었다. 이쯤 되면 이것도 병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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