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경찰 '마약과의 전쟁' 초법적 살인 재수사 가능성도
현지 정부 단호한 의지가 관건…"한국 정부 제대로 목소리 내야"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한국과 필리핀 양국 정상이 고(故) 지익주(당시 53세) 씨 피살 사건을 논의하며 양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합의한 것과 관련해 후속 조치가 제대로 이행될지 주목된다.
24일 대통령실 등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7일(현지시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의 '한·필리핀 정상회담'에서 2016년 발생한 필리핀 한인 사업가 지익주 씨 납치 살해 사건 주범에 대한 형 집행을 위해 공조하기로 합의했다.
◇ "주범은 비호 세력 보호 아래 여론 잠잠해지길 기다릴 듯"
주범인 전직 필리핀 경찰청 마약단속국 팀장 라파엘 둠라오는 항소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자 형 집행이 이뤄지기 전 도주하면서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현지 소식통은 연합뉴스에 "필리핀 경찰청(PNP) 최고위 간부 등 경찰 내부 연루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던 사건"이라며 "필리핀에서 발생하는 외국인 대상 범죄는 윗선의 개입이나 비호,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항소심 재판 과정까지 혐의를 전면 부인한 주범이 지금 입을 열면 사건이 확대될 수 있는 상황"이라며 "비호 세력의 보호를 받으면서 여론이 잠잠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이 재임 당시 주도한 '마약과의 전쟁' 당시 6천명 이상이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고 숨진 '초사법적 살인'(EJKs·Extrajudicial Killings)이 자행된 시기에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반인륜 범죄를 자행했다는 등의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수사를 받고 있지만 협조를 거부하고 있다.
◇ 내년 5월 중간선거 앞두고 '마약과의 전쟁' 부각될 수도
필리핀 법조계 일각에서는 상·하원 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내년 5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 문제가 다시 부각될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한때 '정치적 동맹'을 맺었던 두테르테 전 대통령과 마르코스 현 대통령 측이 공개적으로 서로를 비난하는 등 두 가문은 충돌 양상을 보이는 상황이다.
필리핀 경찰청이 마약과의 전쟁 당시 숨진 유명 인사 사망 사건에 대한 수사를 재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필리핀 대통령실은 지난 16일 "공정한 정의와 국가의 법치주의에 대한 보편적 준수를 최우선으로 여긴다는 것"이라는 입장도 냈다.
동포사회의 한 관계자는 "필리핀 정부가 지씨 사건 재수사나 ICC 수사관의 입국을 허용할 수도 있다"며 "필리핀 경찰의 조직적이며 오래된 외국인 납치 비즈니스나 필리핀 신구 권력 충돌 게이트 등의 문제로도 번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지씨 사건의 경우 수사와 기소를 거쳐 범인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지씨가 왜 범행의 대상이 됐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또 용의선상에 올랐던 최고위 경찰 간부 등에 대한 '꼬리 자르기' 의혹도 해소되지 않았다.
◇ "필리핀 정부 의지에 달려…한국도 제대로 목소리 내야"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들은 이 사건의 의혹 해소와 주범 체포는 필리핀 정부의 의지에 달렸다고 입을 모은다.
한 소식통은 "고질적인 치안 불안, 외국인 관련 범죄 빈발 등으로 인한 부정적인 국가 이미지 확산과 외국인 투자 및 방문에 미치는 악영향 등을 고려해 필리핀 정부가 단호한 척결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 정부도 유럽연합(EU)처럼 경제적 지원 보류나 인권 보호 정책 개선 등을 강하게 요구해야 하는데 실상은 양국 외교·경제 교류 등을 감안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다른 소식통은 "정부가 재외국민의 안전을 위해 대사 초치 등 외교적 항의에 나서고 재발 방지 대책 등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며 "역대 대통령과 여야, 외교부, 대사관 등의 대응 방식은 교민들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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