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겨울을 지난 배우 한해인

잊지 못할 겨울을 지난 배우 한해인

더 네이버 2024-10-23 09:30:35 신고

3줄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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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촬영한 윤수익 감독의 영화 <폭설>이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10월 23일 정식 개봉했다. 총 4부로 구성된 영화에서 주인공 수안은 각기 다른 시간을 통과한다. 배우를 꿈꾸는 10대를 지나, 조연 배우로 고군분투하다 다시 고향 바닷가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상황에 따라 외양도 다르다. 짧은 머리에 교복을 풀어 헤친 톰보이에서 조용히 웃는 긴 머리의 사회인, 이윽고 단발머리에 이완된 모습으로 성질을 바꿔 나간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첫사랑이자 스타 배우인 설이 지나간 길을 뒤늦게 밟는 수안은 긴 시간 어떻게 변화했을까. 수안의 발자취를 따른 끝에 조금 더 자유로워진 배우 한해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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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영화 <폭설>이  처음 상영됐다. 수년 전 촬영한 작품을 보니 어땠나?
이전에 가편집본을 보긴 했지만 정식으로 본 것은 전주영화제에서였다. 어떤 작품이든 ‘이 장면에서 이렇게 해야 했는데’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아쉬움도 컸지만 그 당시에만 연기할 수 있는 모습이 나왔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2019년 이후 추가 촬영을 했다고.
주요 장면은 2019년 연말에 찍었다. 날씨의 영향이 큰 영화인데, 그해 겨울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해에 눈이 오는 날 한두 컷 보충 촬영을 했다. 바다에서 파도를 기다리거나 올라타는 장면은 원하는 크기의 파도가 치는 날 따로 촬영했다. 


1부에서 고등학생을 연기한다. 학창 시절이 되살아났을 것 같다.
수안처럼 예술고등학교를 다닌 터라 특히 혼자 연습하는 장면에서 예전 생각이 났다. 폴더폰처럼 당시 감성이 묻어나는 요소가 많아 그 시절 감정이나 첫사랑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고. ‘내 안에 그때 감성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구나’ 싶었다.


수안이 처음 등장한 연기 수업 장면이 인상적이다. 수안의 성격과 연기에 대한 열정이 모두 드러난다.
<햄릿> 속 햄릿의 대사를 하며 등장한다. 실제로 고등학생 때 햄릿 역을 하고 싶었지만 남성 캐릭터라 오필리어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님에게 햄릿의 대사를 제안했다. 나와 달리 수안은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역을 연기하도록. 다만 햄릿의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아웃사이더 같은 수안이 대사를 빌미로 반 친구나 학교에 느끼는 불만을 털어놓는 장면에 가깝다. 이때 고등학생이 하는 연기를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고민했다. 대사에 완전히 심취해서 연기할지 어설픔이 묻어나게 연기해야 할지 생각했고, 후자의 방식으로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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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 수안은 성인이 되어 배우로 활동한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읊조리는 장면은 10대 시절 열정적인 모습과 대비된다. 1부와 2부 사이 시간을 상상한다면?
고등학생 수안은 어떻게 보여야겠다는 생각이나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연기하기보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그래서 캠코더를 들고 찍고 싶은 영화 생각도 하며 지낸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마냥 마음대로 연기할 수가 없다. 사회적인 여성성을 획득하기 위해 머리도 기르고 세상의 기준에 맞추다 보니 어릴 적 연기를 대했던 방향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감지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작품이 아니라 작은 작품에 간간이 출연하는 입장이라 갈증이 크지 않았을까. 여기에 퀴어로 살면서 무언가 속이고 있다는 감각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불안감과 압박감을 느낀다. 그런 상황에서 ‘그때 설이가 그래서 힘들었구나’ 무의식중에 연결 지었을 것 같다.


선배 배우로서 수안에게 어떤 조언을 건네고 싶나?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데, 현실은 현실이니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렇다고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남을 흉내내기보다 고유성을 고민하고 나만 할 수 있는 역할을 찾는다면 언젠가 그러한 캐릭터와 작품 세계를 만나리라 생각한다. 


관객 입장에서 수안의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미숙하고 불안정한 시절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수안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미숙해서 좋기도 했다. 수안은 뿌리가 자유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스스로 옥죄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연약하고 미숙한 면을 드러낸다. 방황하는 모습이 나와 닮았다고 느꼈다. 결국에는 그런 자신을 마주하며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수안이 오랜 시간 설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해석했나? 종결짓지 못한 관계이기 때문일까.
설이는 수안에게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느낀 감정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수안은 스스로 감정에 이름 붙이기 어려워하지 않나. 그래서 온전히 솔직하지 못했고 후회가 남는 선택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데 설이 사라졌기 때문에 수안은 부재 속에서 되뇌었을 것이다. 그래서 설이 수안의 세계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풀어내지 않으면 수안이 성장할 수 없으므로 계속 설이를 찾을 수밖에 없다. 한때 선명하게 존재했지만 지금은 부재하는 인물이니 수안의 내면에서 존재감이 점점 커져갔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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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찾아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일까?
완전히 무너진 수안은 환상 속에서 바다를 찾는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풀어야 할 마음의 지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설이에 대한 감정은 물론 강원도에서 보낸 시절도 포함된다. 사회에서 보낸 시간보다 더 나다웠다고 생각하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설이 어떻게 성장했을지도 굉장히 궁금했을 것 같다. 수안은 항상 뒤늦게 설이의 감정을 이해하는 인물이니까. 애틋한 마음이 남아 수안을 계속 괴롭혔을 텐데, 무너져내린 순간 마음의 장벽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런 결심을 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실 자신에 대한 것일 수 있다는 ‘투시’가 중요한 대사로 등장한다. 사랑 역시 돌려받고 싶은 행동을 하는 형태로 나아가지 않나. 이 대사를 접했을 때 어땠나?
우선 수안이 설에게 정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느꼈다. 둘은 굉장히 다르지만 강하게 연결된 관계다. 인간이 하는 사랑은 조건적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해도 결국에는 나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온전히 상대를 바라보는 게 가능할까. 결국 우리는 자신을 투영하면서 타인을 만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다면 4부 이후 수안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설이의 부재를 완전히 인정함으로써 크게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수안이 이후에도 연기를 계속할지는 모르겠지만, 온전한 자기 모습대로 살아갈 길을 찾으리라 믿었다. 조금 더 현명하게 내면을 바라볼 힘이 생겼으므로 그걸 꺼내는 창작 작업을 하지 않을까. 영화가 될 수도, 글쓰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을 들으니 <폭설>이 성장 영화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좋아한다. 특히 독립영화는 인물의 여정에서 성장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러한 부분을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었다.


네 가지 파트 가운데 연기하기 재미있었던 파트는 무엇인가?
매력이 다 달랐지만, 혼자 출연하는 장면이 워낙 많아 어떤 파트든 상대 배우와 함께할 때 특히 즐거웠다.


한소희 배우와 리허설할 때 상대의 감정이 밀려드는 경험을 했다고 언급했는데.
3부에서 수안이 설이의 카라반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설이 맥주병을 들고 “너 왜 이렇게 나를 찾아오냐?”라는 대사를 할 때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그 장면과 대사를 정말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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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전 양양에서 한 달 동안 서핑을 연습했다고. 처음 보드 위에 일어섰던 순간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처음은 얕은 파도에서 강사님이 보드를 밀어줄 때 일어선 거라 어렵지 않았다. 그 이후에 큰 파도를 향해 혼자 패들링해서 나아간 뒤 파도를 타는 것이 관건이다. 물을 젓는 팔 힘과 파도를 보는 눈, 자세가 중요하다.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한 달간 거의 매일 입수하며 공포심도 줄어들고 서핑에 재미를 붙인 때였다. 큰 파도가 친 날 선생님, 그리고 로컬 서퍼들과 바다에 들어갔다. 높은 파도에 올라탔는데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느낌이더라. 보드 위에 일어서야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높아 겁이 났다. 그때 맞은편에서 파도를 향해 오던 서퍼가 나를 보더니 “허리를 조금만 더 올리세요”라고 외쳤다. 그래서 자세를 고친 뒤 일어설 수 있었다. 짜릿했던 순간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 


<폭설>을 계기로 겨울에 대한 생각이 변화했는지?
이 영화를 찍으며 이렇게 추운 계절에 뜨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이전부터 겨울을 좋아했다. 눈이나 추위를 중심으로 겨울을 바라봤다면, 영화를 통해 또 다른 색깔의 겨울을 알게 됐다. 겨울을 감각하는 영역이 확장되었다고나 할까. 


수안이 벽에 부딪친 순간 바다를 떠올린 것처럼,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바다를 봐야 살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바다를 보고 온다. 촬영 전 양양에서 혼자 지낸 한 달은 인생에서도 잊지 못할 시간이라 한 곳을 꼽으라면 죽도해변이 떠오른다. 그때 내 모습이 계속 그곳에 남아 있는 것 같다. 파도를 보면 씻기는 느낌도 들고, 심해를 상상하면 신비롭기도 공포스럽기도 하다. 그런 장소에서 위로를 받곤 한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출연작인 백승빈 감독의 <아이 엠 러브>와 정빛아름 감독의 단편 <그냥 영화일 뿐이라서>가 공개됐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궁금하다.
출연한 작품 가운데 오는 12월 영화 <언니 유정>이 개봉한다. 비중이 크지 않지만 이야기 구조상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아직 차기작으로 결정된 것은 없다. 다만 하루하루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려 한다.    

STYLIST 김송이 HAIR 강지원 MAKEUP 황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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