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 타이 모두 톰 브라운. 슬리브리스 톱 드리스 반 노튼. 팬츠 잉크. 슈즈 크리스찬 루부탱.
이건 좀 웃자고 던지는 질문인데요, 노래방에 가면 ‘응급실’을 부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노래방에 가서 제가 스스로 “자, 이제 나 ‘응급실’ 부를게”라고 판 깔고 부르는 게 아니라, 같이 가면 사람들이 이미 다 예약을 해놔요. 그러면 저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반쯤 체념하면서 부르는 거죠. 제가 보컬도 아니었잖아요. 전 ‘izi’ 드러머였거든요. 그런데도 그렇게 예약해놓고 “불러줘, 불러줘” 연호를 해요. 예전에는 그걸 정말 부담스러워했는데, 지금은 ‘제 과거를 이렇게들 좋아해주시는구나’ 생각하고 그냥 고마운 마음으로 불러요.
‘응급실’은 노래방 가면 어떤 방에서든 부르는 걸 한 번은 듣게 되는 노래니까요.
20년이 지났는데도 좋아해주시니 정말 감사하죠. 진짜 한 10년 동안은 노래방 애창 순위 1, 2위를 다퉜거든요. ‘응급실’이라는 노래 제목을 모르는 분들도 있지만, ‘이 바보야 진짜 아니야’라고 한 소절 불러드리면 다들 “아” 하시죠.
드러머로 있었던 ‘izi’는 어떻게 결성된 밴드예요?
그게 참 재밌는데요. 저희 친구들끼리 만든 진짜 완전 인디 밴드였는데, 어쩌다 소개받은 기획사 대표팀네 회사에 들어가게 됐거든요. 그런데 그게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 겸 배우 장나라 선배님네 기획사였던 거죠.
아하! 그래서 2004년에 장나라 씨 가수 활동할 때 밴드 드럼 쳤다는 기사가 난 거군요.
맞아요. 그때 그래서 뮤직뱅크, 인기가요 등등 음악 프로그램을 돌면서 같이 활동을 했어요. 그 뒤에는 밴드 음악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소속사로 옮기기는 했지만요.
음악 활동 중에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나요?
있죠. 자두 씨 녹음 세션도 했었고, 군대 다녀와서는 마지막으로 적우 씨 앨범 녹음 세션도 했었어요.
녹음 세션을 할 정도면 그냥 인디 밴드라기보다는 완전 프로페셔널이셨군요.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했나요?
고등학생 때는 드림시어터, 엑스 재팬, 스키드 로 같은 하드한 음악을 많이 좋아했고, 그 뒤로는 조금 모던한 오아시스나 블러, 트래비스, 콜드 플레이 음악을 들었죠.
당시의 고등학생들을 미치게 만드는 음악들을 들었군요.
아마 고등학생 때의 저를 친구들은 음악에 미친 애로 기억할 거예요. 제가 마산가포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저희 학교가 동아리 특성화 사업 시범 고등학교여서 거의 무슨 예고처럼 동아리 활동을 장려했거든요. 제가 그 고등학교에 간 이유도 인근 고등학교 중에 유일하게 밴드부가 있어서였어요. 고등학교에 가보니까 저처럼 음악에 미친 형들이 있더라고요. 그 형들이랑 밴드부 합주실에서 살면서 하루 종일 드럼만 쳤지요. 2학년 봄에는 아예 음악을 하기로 결심하고 자율학습도 다 빠지고 연습만 했어요. 주말에는 서울로 레슨 받으러 오갔고요.
부모님이 아주 기뻐하시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럼요. 처음에는 엄청 화를 많이 내셨죠. 두 분 다 교사시고 저 역시 고1 때까지는 반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준수한 성적을 유지했거든요.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밴드부 활동을 하면서 성적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죠. 심지어 2학년 때 음악으로 진로를 정하고 나서는 치기 어린 마음에 OMR 카드에 답안도 적어내지 않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어요. 일종의 반항이었죠. 어차피 나는 실기 100%로 들어가는 예술대학 실용음악과에 갈 거니까, 이런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는 아주 꼬마 같은 마음이었죠.
낭만적이네요.
낭만이 아니라 정말 그냥 어린 마음이었죠. 아버지는 엄청 화내셨고요. 저희 반에는 저 같은 애가 저밖에 없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실용음악’을 전공한다는 게 그렇게 흔하지 않았거든요. 마산은 또 지방이다 보니 더 그랬죠.
톱 지민리. 팬츠 베르사체. 벨트 돌체앤가바나.
그렇게 시작한 음악에서 어떻게 배우로 전환하셨어요?
근데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은 음악 할 때 이미 하고 있었어요. 같은 회사에 있는 배우 형이 연극하는 걸 보러 다녔는데, 연기가 너무 재밌어 보였거든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나 연기할 거야”라며 떠들고 다녔어요. 언젠가부터는 정말로 연기 수업도 받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학생들의 단편영화에 출연하기로 마음을 먹었죠.
그게 바로 2012년부터 시작된 필모그래피의 시작이군요. 짧은 기간 몇 년 사이에 12개의 단편영화에 출연했더라고요.
실제로는 12편이 아니라 더 많이 찍었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장 상업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학생들이 배우나 스태프를 구하는 필름메이커스라는 사이트에 가서 무작정 지원하기 시작했죠. 제 나이대나 이미지에 맞는 작품을 찾아서 되는 작품은 거의 다 출연했어요. 그 기간에 영화도 많이 봤고요. 정말 닥치는 대로 봤던 것 같아요. 폴 토머스 앤더슨, 드니 빌뇌브, 데이비드 핀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을 쭉 보기도 하고 배우 하나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보기도 했고요.
그 시절이 어떻게 기억에 남아 있어요?
돈을 잘 벌 수 없었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마냥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 시절이 매일 행복하고 설렜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들의 삶과 비교도 잘 안 했고, 이상하게 긍정적이었어요. 제가 막 ‘긍정 긍정’거리는 성격은 절대 아닌데, 막연하게 제 미래가 기대됐어요. 저도 궁금해요. 왜 그랬을까요?
멋있는 말이네요. 자신의 미래를 기대했다는 말.
정말 그랬어요.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작품을 찍어야지’라는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하고 그 생각을 실현하기 위한 나름의 계획들을 세웠어요. 그 과정이 정말 즐거웠어요.
그렇게 한 3년 정도 있다가 캐스팅된 게 〈공조〉군요.
저는 제가 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2010년이라고 보거든요. 〈공조〉에 캐스팅된 게 2016년이니까 6년의 시간이 걸린 거죠. 한 2~3년 정도 오디션을 본 것 같아요. 계속, 꽤 많이 떨어졌어요. 어떤 배우들처럼 100번도 넘게 떨어진 건 아니지만, 그 기간에 오디션만 한 스무 번은 본 것 같아요.
그 이후로 〈공조〉 〈박열〉 〈군함도〉 등의 큰 영화에 연이어 출연했죠.
참 재밌는 게 〈공조〉에 출연하고 나서 오디션 보면 붙는 확률이 올라가더라고요.
제작진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돌았겠죠.
그런 점도 있긴 한가 봐요. 〈군함도〉에서 일본인 역할이었는데, 다시 함께 출연한 재일교포 김민우 선배님이 저를 좋게 봤나 봐요. 그래서 이준익 감독님께 “괜찮은 배우가 있다”며 제 얘기를 해줬다고 하더라고요. 그 뒤에 이준익 감독님 작품인 〈박열〉에 출연하게 됐죠.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박열〉 같아요. 신원호 감독님도 그 영화를 보고 저를 찾으신 거였으니까요. 이준익 감독님은 〈박열〉 〈변산〉 〈자산어보〉까지 세 작품에 불러주시기도 했죠. 지금도 자주 뵙고 연락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