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미국적인 작가 헨리 테일러가 파리에 있다

가장 미국적인 작가 헨리 테일러가 파리에 있다

바자 2023-11-27 08:00:00 신고

 
〈No Atou〉, 2023, Acrylic on canvas, 152.7x121.5x3.5cm. copy; Henry Taylor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amp; Wirth
〈No Atou〉, 2023, Acrylic on canvas, 152.7x121.5x3.5cm. copy; Henry Taylor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amp; Wirth
 
하우저앤워스가 프랑스 파리에 지점을 열면서 선보인 첫 번째 전시는 헨리 테일러의 «From Sugar To Shit»이다.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오늘날 미국의 대표적인 흑인 구상화가로 자리 잡은 테일러가 30여 년 커리어를 통틀어 파리라는 도시와 이렇다 할 연결점이 없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기획이랄까. 테일러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여름 내내 파리의 루브르박물관과 오르셰미술관 등을 쏘다니며 인상주의, 표현주의, 야수파의 영감을 흠뻑 빨아들였고 그의 신작들에 프랑스 미술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번 전시는 아티스트에게 여행이라는 장소 감각이 어떤 결과물을 촉발하는지 엿볼 수 있는 기회다.
 
 «From Sugar To Shit»은 ‘설탕’이라는 식민주의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미술사 안에서 흑인 문화와 흑인 개인의 역사를 조명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재해석한 〈Forest Fever ain’t Nothing like, “Jungle Fever”〉에서 가운데 남자는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인 축구선수 킬리안 음바페로 대체됐다. 그 앞에 놓인 높이 5m에 육박하는 나무 〈One Tree per Family〉를 이루는 것은 나뭇잎이 아니라 작가가 이발소에서 수집한 흑인들의 곱슬 머리카락, 일명 아프로 헤어다. 〈Got, get, gone, but don't you think you should give it back?〉에는 1920년대에 미국을 떠나 파리로 향했던 흑인 무용수이자 민권운동가 조세핀 베이커가 마치 시몬 리의 조각처럼 무릎을 꿇고 루브르박물관 앞에 앉아있다. 저 멀리 영국해협 위로 대영박물관과 노예선 한 척이 떠 있다. 아프리칸 예술품 약탈과 송환 논쟁에 대한 작가의 분명한 입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 옆에 있는 〈Michelle〉에는 카라 워커의 조각만큼 거대해진 미국의 전 영부인 미셸 오바마가 검은 날개를 단 채 황금으로 장식한 왕좌에 앉아있다. 흑인 여성의 영향력과 존재감을 조세핀 베이커와 미셸 오바마를 통해 불멸의 기념비로 승화한 것이다. 흑인 여성의 탁월함에 대한 그의 찬사는 〈Untitled〉와 〈Blue Me〉에서 좀 더 내밀한 방향으로 전환된다. 흡사 마르셀 뒤샹의 〈The Bottle Rack〉에 빈 세탁세제 병 무더기가 꽂혀 있는 것 같은 이 조각들은 생계를 위해 평생 청소부로 일했던 그의 어머니와 연관짓지 않을 수 없다.
 
〈Forest Fever ain’t Nothing like, “Jungle Fever”〉, 2023, Acrylic on canvas, 76.5x76x3.5cm. copy; Henry Taylor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amp; Wirth
〈Forest Fever ain’t Nothing like, “Jungle Fever”〉, 2023, Acrylic on canvas, 76.5x76x3.5cm. copy; Henry Taylor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amp; Wirth
〈Untitled〉, 2022, Mixed media, 340.4x152.4x99.1cm. copy; Henry Taylor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amp; Wirth
〈Untitled〉, 2022, Mixed media, 340.4x152.4x99.1cm. copy; Henry Taylor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amp; Wirth
 
설탕이 똥이 되듯 혹은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듯 전시는 마침내 개개인의 역사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한 작업들로 확장된다. 갤러리 1층으로 올라가면 가장 헨리 테일러다운 초상화 작업들이 한쪽 벽면에 19세기 파리의 살롱처럼 걸려있다. 테일러는 1990년대 후반까지 정신병동에서 10년 넘게 일했고 그때의 경험은 뿌리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피사체의 인간성을 포착하는그만의 스타일이 됐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어떤 인간이든 저 안쪽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불현듯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주인공의 대사가 떠오른 건, 테일러에게도 이 세상 모든 피사체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명인은 딱 노숙자만큼 그릴 가치가 있고 낯선 사람은 친구만큼 가깝다. 큐레이터 로라 홉트먼은 “테일러의 피사체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한번은 그가 쿠바에 갔죠. 미국인으로서 쉽진 않았을 거예요. 휴대폰도 잃고 지갑도 잃어버렸지만 그곳의 모든 사람을 만났습니다. 휴대폰이 있든 없든 지갑이 있든 없든 그저 초상화를 그렸어요. 그게 바로 테일러이고 그게 바로 커뮤니티입니다.”
 
 사회적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공감’되어 있는 인물들 틈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작가의 자화상 〈No Atou〉였다. 예술가가 케이크 앞에 홀로 앉아있다. 그는 지금 파리의 스튜디오에서 쓸쓸한 생일을 맞이한 상태다. 그 뒤로 한창 작업 중인 딸의 초상화도 보인다. 그렇게 완성된 〈Has anyone seen my cat?〉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No Atou〉와 같은 공간에 걸려있다. 빨간 드레스를 입고 푸르른 풀밭에서 활기차게 뛰노는 딸의 모습은 작가적 상상의 발로이지만 동시에 그 상태로 거기에 실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이라는 기념비를 통해 누군가의 어느 한때가 영원의 순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지켜본 기분. 그러므로 내가 더 이상 그 앞에서 팔짱을 낀 냉담한 관찰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초상화 속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얻는 모든 것’이라는 작가의 예술 철학을 상기한다. 헨리 테일러가 여기에 있다.
 
 
※«From Sugar To Shit»은 하우저앤워스 파리에서 2024년 1월 7일까지 열린다.
 
손안나는 〈바자〉의 피처 디렉터다. 2주 간의 파리 출장에서 헨리 테일러의 멜랑콜리에 공감했다. 
 


글/ 손안나 사진/ ⓒ Henry Taylor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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