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국 북한식당 여종업원 출신, 가수 '최삼숙 딸' 이지안 씨의 한국 정착기

북한: 중국 북한식당 여종업원 출신, 가수 '최삼숙 딸' 이지안 씨의 한국 정착기

BBC News 코리아 2023-11-24 13:34:13 신고

"북한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잘 안 하거든요.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면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어머니 아버지,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인터뷰 내내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이지안 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 씨는 북한을 떠난 이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씨는 지난 2016년 4월 중국 저장성 닝보에 위치한 북한 류경식당에서 일하던 중 지배인 허강일, 북한 여종업원 11명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이 씨는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에게 혹여나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국에서 한동안 외부 활동을 자제하며 외로운 은둔 생활을 해왔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스트레스로 위암에 걸려 위 절제 수술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이 씨는 최근 남북 혼합 밴드를 직접 만들어 연주는 물론 편곡과 연출도 하고 있다.

이 씨가 BBC 코리아 서울지국을 방문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사연을 구체적으로 털어놨다.

평양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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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어린이들

그가 태어난 세상

지안 씨는 가수인 어머니와 영화 촬영감독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북한에서 가장 유명한 여가수였다. 적어도 90년대까지 북한 가요계에서 최고의 위상을 누렸던 가수였다.

최삼숙은 수십 년 동안 왕성한 활동을 했다. 지안 씨를 출산하기 하루 전까지 스튜디오에서 음반 녹음을 했다고 한다.

지안 씨는 북한 평양에서 출생해 2013년까지 평양에서 살았다. 평양 중심부 대동강구역에 위치한 그의 집 방 한 칸은 어머니가 당국으로부터 받은 각종 훈장과 표창장, 사진들로 가득 찼다.

지안 씨는 인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아코디언을 전공했다. 10살 때부터 뛰어난 아코디언 실력을 인정받아 중학교 시절 평양예술학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어머니 최삼숙은 어린 지안이 항상 무거운 아코디언을 메고 다니는 게 내심 마음에 걸렸다. 키가 크지 않을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최삼숙은 딸에게 클래식 기타로 악기 전공을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지안 씨는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평양예술학원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평양교예단에 들어가 교예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일렉 기타를 사용했다.

'교예'라고 불리는 북한의 서커스는 곡예가 진행되는 동안 스릴감 넘치는 배경음악이 깔리는 게 특징인데, 지안 씨가 이 음악을 연주하게 된 것이다. 평양교예단이 선보이는 공중곡예는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서커스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을 정도로 유명하다.

인민배우 최삼숙

지안 씨는 북한에서 가는 곳마다 주목받았다. '어머니가 인민배우 최삼숙'이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지안 씨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엄마 이름이 왜 '삼숙'이에요?"

"내가 네 엄마를 출산한 곳이 38선 부근이야. 38선 부분에서 태어나서 삼숙이라고 지었지."

이지안 씨의 외할아버지,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남쪽에 어린 두 딸을 맡기고 북쪽으로 올라가던 중 1951년 황해도 개성에서 최삼숙을 낳았다.

최삼숙은 딸 지안에게 자신이 어떻게 북한 당대의 유명 가수가 됐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최삼숙은 1964년부터 평양학생소년궁전에서 피아노를 배우면서 음악소조원으로 독창과 중창 공연에 자주 나갔다.

1970년 초, 김정일이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담당했을 때였다.

최삼숙의 공연을 직접 본 김정일은 최삼숙의 노래를 크게 치하했다. 특히 김정일은 최삼숙의 목소리가 소박하고 아련하다면서 "이제 이 가수가 영화음악 주제가를 불렀으면 좋겠다"고 지시했다.

이를 계기로 최삼숙은 1972년 북한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의 주제곡 '꽃 사시오' 등 수많은 영화음악을 녹음하게 된다. 김정일의 특별 지시에 의해 본격적인 가수로 발탁된 셈이다.

최삼숙은 평양음악무용대학 '재직반'에 입학해 체계적인 전문교육을 받았다. 이후 3천여 개의 독창곡을 부르며 북한 가요계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됐다.

최삼숙은 1982년 북한의 예술인들에게 부여되는 최고의 국가 명예인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북한에서 인민배우 칭호는 김일성의 주체적 문예사상과 노동당의 문예정책 기조에 따라, 근로자의 유일사상 강화에 크게 이바지한 연극·음악·무용·영화·교예 등 예술 부문의 배우들에게 수여된다.

인민배우 칭호를 받으면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것은 물론 당국으로부터 집을 받거나 각종 선물을 받는 등 상당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요 황제 남인수

최삼숙의 친삼촌, 즉 지안 씨의 외할아버지의 동생인 작은 할아버지가 바로 남인수다.

그는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에서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가수였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낙화유수', '감격시대' 등의 노래를 부르며 이름을 날렸다.

낙하유수와 감격시대 노래는 북한의 노래방에도 있을 정도로 매우 유명한 노래다. 북한 당국이 일제 강점기에 나온 낙화유수 등의 노래를 계몽기 노래라고 칭하며 국민들이 부르도록 승인했기 때문이다.

남인수의 친인척은 한국과 프랑스 등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2000년 프랑스에 살던 최삼숙의 언니가 평양을 방문해 상봉하기도 했다.

지안 씨는 한국에 와보니 이곳에 생각보다 많은 친척이 있어 놀랐다고 했다.

2000년 서울 첫 방문

사실 지안 씨가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건 지금으로부터 약 23년 전인 2000년 5월 말이었다. '평양교예단'에서 일할 당시 서울 공연차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의 공연은 분단 후 최초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화해 분위기 조성을 위해 마련됐다.

지안 씨는 당시 보름 동안 서울에서 머물면서 6월 4일부터 10일까지 11차례 공연을 펼쳤다.

지안 씨는 당시 서울을 처음 방문한 그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보름동안 머물면서 잠실체육관에서 공연했어요. 서울에 도착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거리의 간판이더라고요. 모든 거리의 간판들이 우리와 똑같은 한글로 적혀 있으니까 너무 신기했어요. 사람들은 물론 가로수 나무들도 평양의 나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그는 서울 공연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갈 때 '나중에 통일이 된 후 다시 서울을 방문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안 씨는 16년 후 자신이 서울에 정착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부인 리설주와 함께 모란봉악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EPA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부인 리설주와 함께 모란봉악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류경식당에서 일하다

중국 등 제3국에 있는 북한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려면 무엇보다 인물이 좋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얼굴이 예뻐야 한다.

그리고 재능이 있어야 한다. 노래를 잘 부르거나 악기를 잘 다루는 등 예술적인 재능과 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나이다. 어린 여성들로만 뽑는 것이다. 이 씨에 따르면 보통 해외 여종업원의 경우 주로 23세 미만으로 뽑고, 나이가 많으면 해외로 내보지 않는다.

어리고 예쁘고, 음악적 재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성분이 좋지 않거나 해외로 나가면 안 되는 결격 사유가 있다면 최종 선발에서 탈락하게 된다.

선발되는 예비 종업원들은 크게 두 가지를 교육받는다. 우선 봉사 양성소에서 접대 서비스 등에 대한 기본적인 절차를 교육받고, 음악 양성소에서 노래나 무용 등 음악 교육을 받게 된다.

이 씨가 중국 저장성 닝보에 있는 북한 류경식당에서 일하게 된 건 예비 종업원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일을 잠시 했던 게 계기가 됐다.

이후 지안 씨는 류경식당에서 여종업원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 역할을 했다. 필요할 경우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이 씨는 중국 류경식당에서 일할 당시 힘들고 외로웠다고 회상했다.

"종업원들은 다들 짝꿍이 있는데 저는 나이도 많으니 속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동료가 한 명도 없어서 많이 외롭더라고요."

2016년 4월 중국에 있는 북한 식당을 집단 탈출해 한국에 들어온 여종업원들 모습
BBC
2016년 4월 중국에 있는 북한 식당을 집단 탈출해 한국에 들어온 여종업원들 모습

여종업원 집단 탈북

류경식당에서 일하던 지배인 허강일 씨는 여종업원 12명과 말레이시아를 거쳐 2016년 4월 7일 국내로 입국했다.

허 씨는 과거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국가정보원 요구로 여종업원 12명과 함께 한국으로 왔으며 당시 여종업원들은 목적지도 모르던 상태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안 씨는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당시 지배인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사실 한마디로 결론을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한국으로 가기까지 많은 과정들이 있었고 여러 가지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다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안 씨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12명의 여종업원이 서울에 입국하고 나서 한국 정치권에서는 이른바 '기획 탈북'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한국의 정보당국이 계획적으로 이들의 탈북에 개입돼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북한은 종업원들의 가족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가족들은 자녀들이 허 지배인과 한국의 국정원에 의해 납치됐다며 조속한 송환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이 기자회견에는 최삼숙도 참석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지안 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저는 어머니가 북한 기자회견에 나와도 한국 언론들이 저희 어머니를 알아보고 '최삼숙'이라고 기사를 내보낼 줄은 생각조차 못 했거든요. 그런데 아주 적나라하게 어머니의 이름과 저의 행방에 대해 TV에 다 나와버려서 저는 심리적 압박감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외로운 서울 생활

이 씨는 한국에 도착한 후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보던 중 깜짝 놀랐다. 어머니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윤세리(손예진)는 군관 사택 마을에서 자신을 '최삼숙'이라고 소개한다. 드라마에선 또 LP판에 적힌 '최삼숙' 가수의 실제 노래 '심장에 남는 사람' 제목이 나오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의 이름과 음반이 한국 드라마에 나오니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 북한에 있는 어머니도 이 장면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씨 한국에 정착한 후 수도권 대학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했다. 어려서부터 철학이나 인문학이나 심리학에 관심이 있었고, 음악 예술 분야를 잠시 벗어나 자신을 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내면의 상처도 많이 치유됐다고 했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나는 탓에 대학에서 친구들을 사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 너무 외로웠어요. 마음속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동료나 가족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힘들었어요. 이렇게 심적으로 힘든 상황임에도 대화할 사람도 없고 혼자서 풀어나가야 하니 더욱 힘들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TV 방송사 등에서 인터뷰와 출연 요청이 여러 차례 왔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활동하기에는 심적 부담이 너무 많이 됐기에 모두 사양했다.

위암 투병

지난 2019년 지안 씨는 극심한 복통에 시달렸다.

통증이 심해져 병원을 찾았다. 위암이었다. 지안 씨는 위암 2기라는 의사의 말에 눈 앞이 캄캄해졌다.

가족 중에서도 위암에 걸린 사람은 없었기에 충격은 컸다. 다행히 암이 많이 진행된 상태는 아니었다.

몇 달 후 지안 씨는 위 절제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스트레스가 발병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사실 한국에서도 힘들긴 하지만 중국에 나와 있었을 때도 힘들었거든요. 한국에 와서 이 스트레스가 확 커지면서 뭔가 몸에 안 좋은 것들이 쌓이면서 위암에 걸리게 된 것 같아요."

의사는 그에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암이 재발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3대째 이어오는 음악

잠시 병상에 누워있었지만, 뭔가를 해야만 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지안 씨는 처음에 한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스트레스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을 잃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지면서 다시 기타를 손에 잡았다. 이후 남북한 음악인들이 함께하는 밴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한국 사회에서 도전하는 첫 프로젝트라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보컬 등 한국인 음악가 5명과 북한 전문 음악인 출신 3명이 합쳐진 혼합 밴드를 만들었다.

편곡과 연출, 공연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지안 씨가 담당했다. 그는 북한의 대표적인 노래인 휘파람에 한국 특유의 랩을 넣어 편곡했다.

첫 무대는 성공이었다. 공연을 본 주최 측이 다음 행사에 한 번 더 공연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지안 씨는 밴드를 만들고 나서 느낀 게 있다고 했다. 반세기 넘는 분단의 세월로 인해 한국과 북한의 음악 차이가 작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자신이 편곡한 음악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감동받는 관객들의 호응을 보면서, 향후 남과 북의 음악 예술 문화 분야를 좁히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됐다.

BBC 코리아와 인터뷰를 갖고 있는 이지안 씨
BBC
BBC 코리아와 인터뷰를 갖고 있는 이지안 씨

'어머니 사랑해요'

중국 류경식당 종업원들은 3년 가까이 일하면서 북한에 단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지배인만 주기적으로 평양에 출장을 다녀올 수 있었다. 지배인은 평양에 다녀올 때면 종업원들의 가족들이 쓴 편지를 가져왔다.

지안 씨는 2016년 초 어머니 최삼숙이 쓴 편지를 전달받았다. 어머니는 편지에서 딸에 대한 그리움을 빼곡히 적었다.

"딸아, 너의 빈자리가 많이 느껴지는구나. 어려서부터 맏딸인 네가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많이 도와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때는 잘 몰랐었는데 우리 딸이 없으니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구나. 딸아, 보고 싶고 얼른 만나고 싶구나. 그날까지 건강해야 한다."

그게 어머니로부터 받은 마지막 편지가 될 줄은 몰랐다.

요즘처럼 외로울 때면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사무친다고 했다. 지안 씨는 부모님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너무 슬퍼요. 부모님께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들이 너무 후회가 되고... 북한에 계신 부모님의 목소리를 단 한번만이라도 듣고 싶어요.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어머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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