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안녕, 작은 인간

[엘르보이스] 안녕, 작은 인간

엘르 2023-10-07 00:20:00 신고

ⓒTanaka Tatsuya


ⓒTanaka Tatsuya




안녕, 작은 인간
결혼 전 남편 다니엘과 나는 아이가 생기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아이가 우리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만약 그렇다면 둘이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글 쓰고 개와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좋을 거야. 그럼에도 종종 다니엘을 닮은 아이를 상상하는 마음이 솟아오르곤 했다. 이전에 난자 냉동 시술을 한 것도 어쩌면 내 마음 깊은 곳에선 아이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안의 작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알린 타이밍은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결혼식을 열흘 앞둔 2월의 어느 날, 태몽을 믿지 않는 영국인조차 태몽이라 여길 만한 꿈을 꿨다며 들려주었고, 왠지 모를 직감에 이끌려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했는데 설마 설마… 진짜 임신이라니! 난생처음 보는 두 줄은 작은 인간이 세상에 왔음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강렬한 교감이 왔고, 기쁨인지 놀람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터져나왔다.

결혼식이 끝남과 동시에 시작된 지독한 입덧. 임신이 상상과 다르다는 걸 실감하게 해준 첫 번째 난관. 명백하게 알고 있던 음식 맛이 모두 ‘리셋’됐고, 좋아하던 음식을 상상만 해도 속이 울렁였다. 계속 배멀미하는 기분에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계속 누워 있기 일쑤였다. 임신이 이렇게 힘들다는 걸 알았더라면 난 못했을 거야.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든 시기였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흘러 임신의 황금기라는 중기가 찾아왔다. 에너지가 회복되고 집중력이 찾아오자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행복했다.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 묻지 않아도 되는 증명할 필요 없는 행복함이 선명하게 존재했다. 이전에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던 때가 있었나. 늘 기본값으로 존재하던 불안감에 쫓기지 않았고, 성취에 대한 압박감에서도 자유로워졌다. 생명의 신비함도, 하루하루 변해가는 내 몸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쑥 두려움이 찾아오곤 했다. 콩알보다 작던 작은 인간이 30~40cm만큼 커져서 존재감을 드러낼수록 앞으로 펼쳐질 변화들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병원을 다녀오는 날은 급격히 우울했다. 출산을 생각하면 몸이 떨렸고, 제왕절개를 한다면 내 몸엔 전에 없던 흉터가 생길 수 있었다. 친구가 물려준 중고 아기 물품을 차에 싣고 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를 받은 듯 막막함을 느꼈다. 가장 큰 두려움은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은 우리 부부에게 생긴 자유의 제약이었다. 어쩌지, 이미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왔는 걸. 그리고 내 일. 엄마가 되는 것이 커리어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임신 기간에도 나를 찾아주고 일을 의뢰해 주는 것이 기쁘게 느껴진 건 그런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몸은 조금 힘들지언정 일할 수 있었고, 하고 싶었다. 출산 보름 전까지 매일 아침 생방송을 진행하고 여러 활동을 하면서 임신기를 지나온 것이 나에겐 오히려 활력이 됐다.

ⓒFernando Andrade


ⓒFernando Andrade



‘아이가 태어나도 절대 ○○ 엄마라고 불리지 않을 거야.’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다니엘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아이가 태어나고 엄마가 되더라도 늘 나는 나일 거다”라고. 임신 과정을 지나며 여러 기복에서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파트너의 역할이다. 멋진 엄마이기 전에 멋진 인간으로 계속 살아가길 응원해 주는 남편의 지지는 기분 좋은 의무감으로 다가왔다.

얼마 전 침실에 아기 침대를 들였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생생함은 강력한 법이다. 아이를 낳는 것이 무서워 가끔 눈물바람이 되던 큰 인간은 그 현실감각 앞에 불쑥 용기가 생겼다. 담담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사실 육아책을 읽어도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부모는 우리를 또 이렇게 키워냈으니, 우리도 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자다가 배가 무거워 끙끙거리며 깨는 날도, 가끔 배가 이렇게 나온 걸 잊고 거리 계산을 잘못해서 모서리에 툭 부딪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출산 D데이가 다가올수록 상상하게 된다. 작은 인간은 어떤 눈동자 색을, 어떤 성격을 가졌을까. 그리고 남편에게 속삭인다. “나는 어린 시절에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음악을 들은 다니엘이 부러웠어. 우리 아이에게 세상의 여러 음악을 들려줘. 나는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줄게. 무엇을 하더라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

우리가 작은 인간이 세상에 적응하도록 돕듯, 작은 인간은 우리의 세상을 놀랍게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만들겠지. 이번엔 꿈틀거리는 너에게 말해 본다.
‘곧 만나. 작은 인간. 어쩌면 금세 널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너로 자랄 수 있도록 아름다운 거리를 지킬게. 우리, 잘해보자.’




임현주
듣고, 쓰고, 읽고, 말하는 MBC 아나운서. 좋아하는 것을 하며 신중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부지런한 나날을 담은 책 〈아낌없이 살아보는 중입니다〉 〈다시 내일을 기대하는 법〉 등을 썼다.


에디터 이마루 디지털 디자이너 장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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