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모든 감정에 축복을

[엘르보이스] 모든 감정에 축복을

엘르 2023-10-04 00:21:48 신고

 ⓒOleg Ivanov


ⓒOleg Ivanov


모든 감정에 축복을


요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픈 채로 훈련하는 사람은 또 다른 아픈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힘을 배운다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알아차리고 힘을 나누기 위해 이 인생을 경험하고 있는 걸까. 다른 여성 뮤지션에게 이해하고 공감 간다는 말을 전하기는 아직도 조심스럽지만 이제 좀 알 것 같다. 우리는 하나의 유기체 같다. 멋진 음악을 하고 어떤 면에서 아름답고 그래서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음악가.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은 그녀 역시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있다. 네가 너의 얼굴과 이름을 앞에 내걸고 뮤지션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너는 바람 부는 벌판에 혼자 서 있는 기분(실제로도 그렇다는 걸)을 느끼지. 뒤엉킨 관계들과 금전 문제, 새로운 불면증과 끝없는 우울증, 수많은 최악의 경험들…. 그런 일 따위는 없는 듯 무대 위에서 우아하게 노래하는 여자들아. 나도 조금은 그래. 만약 네가 불합리한 일을 겪었다면 나보다 먼저 겪었을 뿐이지. 네가 아프다면 나도 그 일로 아프겠지. 내가 아플 때도 아파해줄래? 너에게 묻기보다 믿어보려고 한다. 우선 나 자신부터.

요즘은 가로세로 3cm 남짓한 탁상 캘린더의 날짜 칸에 그림을 그린다. 미술치료를 하는 정은혜 선생님의 수업 ‘감정 파도’에서 배운 감정 일기 그리기다. 방법은 이렇다. 하루의 일과 감정에 집중하며 이끌리는 색깔을 고른다. 자유롭게 낙서한다. 이때 상징적인 심볼을 쓰지 않는 게 좋은데, 만약 사랑을 그리고 싶다면 하트 모양을 그리는 대신 당신이 느끼는 사랑을 그리는 식이다. 나만 아는 감정들, 나도 몰랐던 마음들이 작은 그림으로 번역돼 남겨진다. 한 칸씩 채워진 알록달록한 캘린더는 어떻게 살 것인가 만끽하고 방황한 생의 흔적이다.

 ⓒIlyuza Mingazova


ⓒIlyuza Mingazova



누군가의 하루와 일주일을 느낀다. 강의가 펼쳐지는 줌 강의실의 구겨진 픽셀 속에 있는 수강생들의 다양한 그림일기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그의 아픔과 슬픔,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새가 배우지 않고도 둥지를 짓듯 인간에게도 타고난 공통 언어와 집단 무의식이 있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서로의 그림을 읽을 수 있다. 부드러움과 자유로운 선은 당신이 행복할 때, 화는 뾰족하고 뜨거운 색, 슬픔은 하강하는 이미지.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감정은 당신이 바라보면 사라집니다. 모든 감정은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파도처럼 타고 흐르기를 소망합니다.” 아름다운 말이지만 어렵다. 고통도, 슬픔도 바라보는 연습은 까다롭다. 판단하지 않고 살펴주면 내면의 스승이 옳은 길을 보여줄까.

옳은 길이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감정 일기 속의 파도를 보면 내 패턴은 읽을 수 있다. 두통처럼 뾰족한 검은색 라인은 나의 화. 처음에는 얼어붙었다가 다음날에는 불처럼 커진다. 술을 마시면 분노가 더 화려해진다. 알코올은 몸을 피곤하게 만든다. 피곤이 지나면 불안해진다. 불안의 색깔 속에는 의욕이 몰래 숨어 있다. 그 의욕이 묻는다. 네가 진짜 원하는 모습은 뭐였어? 화내는 것을 넘어 강하고 선하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다음날로 건너간다.

동료에게 하소연하고 돌아오는 길의 후회, 멍청해지고 싶어서 마신 술, 지하철을 타다 문득 상담 선생님의 말을 메모하는 시간, 요가 매트 위에서 쓰러져 울던 날들. 그렇게 고통은 지나간다. 지나가지 않으면 흘려보내리라. 그러고 나면 나를 위해 따뜻한 쑥차를 내오는 내가 문득 찾아온다. 어떤 계기가 나를 움직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많은 손이 이미 내 등을 밀어주고 있었고 마지막에 닿는 한 손이 회복의 트리거가 돼준다. 사라지는 우리의 감정에 추모를, 내일 태어날 우리의 감정에 축복을.




김사월

네 번째 정규 앨범을 준비하는 싱어송라이터. 2020년 에세이 〈사랑하는 미움들〉을 썼다. 잘 울고 잘 웃다가 뭔가를 기록하는 사람.



에디터 이마루 디지털 디자이너 장정원

Copyright ⓒ 엘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