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후 생존기 그린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 "이병헌 연기에 '영화적 순간' 느껴…박찬욱은 좋은 스승님"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쁘게만은 보이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기심을 보이면서 악으로 치닫지만, 그것이 이해되고 연민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7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엄태화 감독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연출 방향성을 묻는 말에 이같이 답했다.
오는 9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생존기를 그린다. 보통의 사람들이 재난 이후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와 선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엄 감독은 "내가 저 상황에 부닥쳤으면 어떤 선택을 할지 생각하면서 관람하면 좋겠다"면서 "주제성이 강하긴 해도 130분 동안 몰입하면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소개했다.
영화는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 2부 '유쾌한 이웃'을 뼈대로 했다.
엄 감독은 재난 장르나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지닌 작품은 많지만, 그 배경이 아파트인 점에 끌렸다고 한다.
"한국 사람의 절반 정도가 아파트에 살다 보니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많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주거 공간인 동시에 자산이잖아요. 가격이 오르고 내리는지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죠. 그게 굉장히 슬프게 다가왔어요. 집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애증이자 애환이 되어버렸죠."
그래서인지 엄 감독은 황궁아파트 주민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로 구성했다. 사기 피해를 본 힘없는 가장 영탁(이병헌 분), '영끌'로 겨우 전세 신혼집을 마련한 부부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가 주인공이다.
특히 영탁이 갑작스레 새 입주인 대표가 된 이후 차츰 독재자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원작에서는 변함 없이 내내 악당으로 나오는 캐릭터다.
엄 감독은 "이병헌씨가 캐릭터가 변화하는 걸 보여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먼저 했고, 저도 그에 동의해 바꾸게 됐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그 당시 시나리오가 거의 완성된 상태여서 새로운 신을 넣거나 이야기를 더하기는 어려웠다는 거예요. 영탁과 관련한 딱 한 장면만을 추가하게 됐는데, 내심 걱정이 되더라고요. 장면 하나로 과연 설명될까 하고요. 그런데 이병헌씨는 그 짧은 순간, 대사 한마디 없이 안면의 떨림과 눈빛으로 설명해내더라고요. 이게 '영화적 순간이라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지요."
이병헌은 촬영 과정뿐만 아니라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제작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병헌이 빠르게 캐스팅을 수락하자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등도 잇달아 출연을 결정했다. 220억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가 필요했지만, 스타 배우들의 출연 확정으로 투자에도 탄력을 받았다고 엄 감독은 회고했다.
"이병헌씨는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잖아요. 영탁 역을 제안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잘 소화해내리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았죠. 출연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 역시 이 영화를 잘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감사했던 건 (경험이 비교적 적은) 저를 존중해주시려는 노력이 보였다는 거예요. '이게 더 나아'라고 단정하는 게 아니라 '이런 건 어때요?'라며 물어보는 식이었어요."
박찬욱 감독 등이 메가폰을 잡은 '쓰리, 몬스터'(2004)에서 연출부로 있던 시절 이병헌이 당시 그 영화의 주연이었던 점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라고 엄 감독은 말했다.
배우 엄태구의 형이기도 한 그는 '친절한 금자씨'(2005), '파란만장'(2011) 등 박 감독의 작품에서 조연출로 일하며 초기 경력을 쌓았다. 이후 '잉투기'(2013) 등 독립영화로 연출작을 선보였다.
이번에 처음으로 대작에 도전하게 된 그는 '밀수'의 류승완 감독, '비공식작전' 김성훈 감독, '더 문' 김용화 감독 등 쟁쟁한 선배들과 여름 극장가에서 치열한 경쟁에 들어간다.
스승이나 다름없는 박찬욱 감독이 '콘크리트 유토피아'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하는 등 지원사격에 나선다.
"박 감독님이 안 계셨다면 제 꿈에 한계가 있었을 거예요. 그분은 한계 없이 계속 가시잖아요. 덕분에 제가 따라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스승님의 뒤를 잘 따라가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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