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이 교수는 본명이 June Huh인 미국인이지만,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서울대학교에서 석사까지 마쳤습니다. 수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이었죠. 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에 한국이 기뻐한 것도 그 덕입니다.
그는 수상 후 두 달 가량 한국에서 지내며 강연이나 간담회 등의 형태로 대중과 만났습니다. 빡빡한 스케줄 속엔 모교인 서울대학교 제76회 학위수여식 축사도 있었어요. 팬데믹 여파로 3년 만에 대면으로 열린 29일 학위 수여식에 나타난 허준이 교수는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도 받았습니다.
이날 많은 졸업생 후배들 앞에 선 그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라고 짧게 자신을 소개한 후 축사를 시작했습니다. 평균적으로 80년, 약 30000일을 건강하게 산다고 했을 때 그 중 또렷이 기억에 남은 날들이 얼마 없을 거라는 사실을 짚은 허준이 교수는 졸업식이라는 특별한 하루를 공유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문을 열었어요.
그러면서 겁이 나서,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 생활이 부끄러워 15년 전 자신의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고백하기도 했죠. 대학생 허준이가 경험한 길 잃음의 연속을 언급하며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라는 솔직한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그건 축사를 듣고 있을 졸업생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란 위로와, 앞으로 더 힘들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조언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어른'이 되는 졸업 이후 듣게 되는 천편일률적 조언 대신 허준이 교수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제안했습니다.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하는 사회에서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과 지쳐버린 타인,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란다고 했죠.
이어지는 그의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란다"라는 냉정하면서도 따뜻한 그 한 구절이요. 허준이 교수는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란다"라고 했습니다.
필즈상 수상 직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젊은 학자들에게 "스스로에게 친절하라"라는 조언을 했던 허준이 교수 다운 축사였습니다. 다음은 허준이 교수의 축사 전문인데요. 시인이 되고 싶어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그의 글에선 금속성의 날카로운 수학적 지식들이 오히려 어깨를 토닥여 주는 느낌이 드는군요. 천천히 읽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친절했는 지를 돌이켜 봐도 좋겠어요.
우리가 팔십 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삼만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 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삼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학위 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아니면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 생활이 부끄러워 십오 년 전 이 자리에 오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은 축하 받을 만한 일을 축하 받기 위해 이를 무릅쓰고 이곳에 왔습니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 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천 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 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 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 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 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에디터 라효진 사진 GettyImages/서울대학교 유튜브 영상 서울대학교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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