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안중열 기자] 전 세계 정·재계 리더들이 집결한 스위스 다보스의 설원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얼어붙었다. 19일(현지시간) 개막한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연차총회가 내건 슬로건은 ‘대화의 정신(Spirit of Dialogue)’이다. 그러나 화려한 슬로건 뒤에 흐르는 기류는 정반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년 만에 귀환하면서, 다보스는 대화의 장이 아닌 ‘힘의 논리’가 정면충돌하는 격전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올해 다보스포럼은 단순한 연례행사가 아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앞세운 트럼프 행정부와 이에 맞서는 유럽 간의 통상·안보 갈등이 임계점에 달한 상황에서 열리는 ‘지정학적 시험대’다.
◇“대화는 끝났다, 선택만 남았을 뿐”…트럼프의 ‘힘의 외교’
오는 21일 예정된 트럼프 대통령의 특별 연설은 이번 포럼의 최대 분수령이다. 그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국무·재무·상무·에너지 장관 등 핵심 각료는 물론, 스티브 윗코프 중동 특사까지 대동한 역대 최대 규모의 ‘매머드급 사절단’을 꾸렸다. 다보스 중심가에 보란 듯이 설치된 ‘미국관(America Pavilion)’은 이번 포럼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기업인 수행단이다. 그간 ‘기후 위기’와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강조해 온 다보스 주류와 거리가 멀었던 엑손모빌, 셸, 토탈에너지스 등 글로벌 석유 공룡 CEO들이 트럼프의 호위무사처럼 등장했다. 여기에 마이크로소프트(MS), 엔비디아, 오픈AI, 팔란티어 등 AI·방산 기술 기업 경영진까지 대거 합류해 미국의 달라진 산업 우선순위를 과시했다.
현지의 한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이 에너지와 AI 패권, 그리고 우크라이나 종전 구상과 관세 압박을 하나의 ‘전략 패키지’로 묶어 동맹국들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할 것”이라며 “이번 연설은 대화 제의가 아니라 사실상의 ‘최후통첩’ 성격이 짙다”고 분석했다.
◇그린란드 나비효과…유럽, ‘각자도생’의 딜레마
대서양 동맹의 균열은 ‘그린란드 매입’ 이슈를 고리로 이미 수면 위로 드러났다. 트럼프 대통령이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 매입 의사를 재천명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유럽 국가들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다. 이로 인해 유럽연합(EU)은 사분오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당사국인 덴마크는 항의의 표시로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는 초강수를 뒀지만, 다른 회원국들의 셈법은 복잡하다.
특히 관세 타깃이 된 유럽의 양대 축인 독일과 프랑스는 확연히 다른 대응 방식을 보이며 엇박자를 내고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트럼프의 관세 위협은 이제 상수(常數)가 됐다”고 전제하며, 감정적인 맞대응보다는 냉정한 협상을 통해 실익을 챙겨야 한다는 ‘현실론’을 피력했다. 반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강경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일명 ‘무역 바주카포’로 불리는 통상위협대응조치(ACI) 발동 가능성까지 시사하면서, “유럽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에는 단호히 맞서야 한다”는 ‘강경론’을 주도해 독일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EU는 트럼프 연설 직후 긴급 회원국 정상회의를 소집해 대응책을 논의할 예정이나, 이처럼 회원국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있어 단일대오 형성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담장 밖은 시위, 안은 ‘그들만의 리그’…韓 존재감은 ‘글쎄’
‘불평등 해소’와 ‘대화’를 외치는 포럼의 모순도 극에 달했다. 행사장 밖에서는 스위스 사회민주당 청년조직 등 시위대가 “억만장자와 독재자들을 위한 파티를 중단하라”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스위스 당국이 보안 비용으로만 4100만스위스프랑(약 600억원)을 쏟아붓고 전투기와 저격수까지 배치한 풍경은 ‘대화의 정신’이라는 주제를 무색하게 만든다.
글로벌 질서가 재편되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한국의 존재감이 희미하다’는 점은 뼈아픈 대목이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정부를 대표해 참석했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는 모두 불참했다.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빅테크와 에너지 기업들이 트럼프 행정부와 새로운 파트너십을 모색하는 자리에서 한국 민간 외교 채널이 가동되지 않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며 “통상 압박이 거세지는 시기일수록 현장에서의 네트워크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닷새간의 열전에 돌입한 다보스. 겉으로는 평화와 번영을 논하지만, 테이블 아래에서는 국익을 위한 냉혹한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다. 트럼프의 입에서 나올 말이 세계 경제에 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전 세계의 이목이 스위스 산골 마을로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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