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시 공개 거부에 5일 유예, 소송까지…사법부 부담 가중 우려도
사적제재로 이어질 가능성 농후…"피해자 중심 제도 개선·공적제재 강화해야"
(춘천=연합뉴스) 박영서 강태현 기자 = 교제하던 여성 군무원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강원 화천군 북한강에 유기한 현역 군 장교 양광준(38)의 신상이 검거 이후 10일 만인 13일 공개됐다.
그러나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이번 사건에서 '피의자가 즉시 공개에 동의하지 않으면 공개 결정 후 최소 5일의 유예기간을 두어야 한다'는 법 조항 탓에 신상공개가 애초 계획보다 늦어지면서 '흉악범의 과도한 인권 보호'와 관련한 피로감을 가중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양광준이 단순히 신상공개 거부에 그치지 않고 법적 대응으로까지 나아가면서 법적 테두리 밖에서 행해지는 '사적 제재'에 대한 욕구가 일었고, 결국 경찰의 신상공개 전 양광준의 이름과 나이는 물론 가족관계, 출신학교 등이 상세히 폭로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 중대범죄신상공개법 올해 본격 시행…이의신청 규정 등 포함
경찰이 양광준의 신상공개를 결정하고, 양광준이 즉시 공개에 제동을 걸 수 있었던 법적 근거는 올해 1월 시행된 '특정중대범죄 피의자 등 신상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중대범죄신상공개법)'에 있다.
기존의 특정 강력 범죄와 성폭력 범죄에 그쳤던 신상공개 대상 범죄를 신상공개 대상 범죄를 중상해나 사망을 초래한 특수상해·중상해,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마약범죄 등까지 확대한 법이다.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은 신상공개 대상자의 동의가 없어도 수사기관이 체포된 범인을 촬영한 사진, 이른바 '머그샷'을 촬영해 공개할 수도 있어 일명 '머그샷법'으로도 불린다.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은 피의자 의견 청취 절차와 신상정보 공개 전 5일의 유예기간, 불송치·불기소·무죄 확정 시 별도의 형사보상 규정과 같은 신상공개 대상자의 인권 보호와 방어권 보장을 위한 절차도 규정하고 있다.
수사기관은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을 근거로 신상정보를 공개하기로 결정하면 이 사실을 피의자에게 통지하면서, 통지서에 행정심판법과 행정소송법에 따라 불복할 수 있음을 명시한다.
이와 동시에 '신상정보 공개 결정 확인서'를 통해 이의 여부에 관한 의사를 피의자에게 묻는다.
이때 피의자가 서명하면 즉시 공개가 이뤄지고, 서명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하면 최소 5일의 유예기간을 갖고 공개하게 되는데 양광준의 경우 후자에 속한다.
◇ '최소 5일 유예' 틈 이용해 법적 대응하는 피의자들
피의자들은 5일이라는 유예기간을 활용해 가처분 신청과 행정소송 제기 등 법적 대응에 나선다.
양광준은 지난 7일 경찰이 신상 공개를 결정한 바로 다음 날 법원에 신상정보 공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과 함께 본안소송인 '신상정보 공개 처분 취소 청구'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신청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 발생 우려가 없고,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 발생 예방을 위한 긴급한 필요가 없다"며 지난 11일 양광준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이에 경찰은 유예 기간(8∼12일)이 끝난 13일에서야 양광준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었다.
신상공개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여전히 남아 있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보통 국민적 공분이 큰 사건은 발생 초기부터 신상공개를 촉구하는 여론이 큰 점을 감안하면 최소 5일이라는 유예 기간이 더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번 사건에 앞서 이별을 통보하려 한다는 이유로 여자친구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그의 어머니도 다치게 한 김레아(26)도 올해 4월 5일 검찰의 신상공개 결정에 불복해 가처분 신청을 냈다가 기각되면서 같은 달 22일에서야 신상이 공개된 바 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약 1개월 만이자, 재판에 넘겨진 지 1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학교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최소 5일의 유예제도를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고, 그 자체로 불필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사법부의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처럼 신상공개와 관련해서 복잡한 제도를 두는 곳이 없다"며 "피의자 인권 과잉보호"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공개 유예라는 틈을 이용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보이는 만큼 유예 절차는 폐지하고 제도의 존속 여부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며 "공적인 사건은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특별한 경우에만 언론에서 재량껏 모자이크 처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 사적제재로 흉악범 참교육?…전문가들 "2차 피해 우려"
"피의자가 꺼린다고 신상공개 미룬 걸 여기서 하네. 감사합니다", "범죄자 권리 챙기느라 피해자만 죽어가는 나라. 속이 다 시원합니다"
한 유튜브 채널은 지난 11일 양광준의 신상을 폭로했다. 해당 채널은 이름부터 가족관계, 일상 모습, 출신학교 등을 알 수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양광준의 즉시 공개 거부로 인해 "흉악범의 인권을 과도하게 보호하는 행위"라는 반발이 높았던 시점이었다.
수사기관이 아닌 개인이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한 점과 모자이크 처리하긴 했으나 범죄와는 무관한 가족들의 모습까지 공개했다는 점에서 '사적제재' 논란이 일 수 있는 지점이지만, 통쾌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면서 사적제재 논란은 이번 사건을 비껴가는 모양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방식의 신상공개가 2차 피해뿐만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가짜뉴스'로 인한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 형법상 명예훼손 또는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소지도 있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웅혁 교수는 "사적제재는 비극의 사건을 상업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국민의 알권리 충족도 아닐뿐더러 이로 인해 또 다른 피해자와 가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 측면에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윤호 석좌교수도 "사적제재에 대한 욕구는 공적제재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인해 생겨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허용될 수 없다"며 "형벌권은 오직 국가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며 민간인이 함부로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적제재는 국민 눈높이와 법 감정에 맞는 공적제재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며 "피해자 중심의 제도 개선과 사적제재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의 공적제재 강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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